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43화

by 설다람

"매각하러 왔다고?"

"TM을 들고 와서, 속사포처럼 설명했습니다."

"TM이 뭐야?"

담당자는 머릿속에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간단한 회사 소개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거 여기서 잘라. 더 위로 올리지 마."

"네, 제 선에서 묵살시키겠습니다."

담당자는 네이버 부동산 기획팀 친구에게 혹시 넥스노트에 아냐고 전화로 물었다. 같은 업종이니까. 운 나쁘게도, 친구의 자리는 부대표실 바로 옆이었다. 넥스노테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심찬은 이것저것을 따져 물었다. 담당자는 이것저것을 저것이것으로 답했다. 미팅 전 이심찬은 요청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보고해라고 당부했다. NK 부동산에 속한 몸이 아니기에 NK 부동산 부대표의 지시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심찬이 가진 NK 내부 인맥을 생각한다면 몸을 사리는 것이 마땅했다.

넥스노트 측에서 탄탄하게 자료를 준비해 왔지만, 흥미롭진 않았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굳이 심찬의 개입이 아니었더라도, 빈손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NK의 M&A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위에서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 진행되기 어렵다. 초율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잡은 미팅이었다. 엔젤윙즈를 가까우 두면 떨어지는 고물이 많았다. 비상장 기업을 투자할 때, 요긴한 정보를 흘리니.

점심을 먹고 나서 동료와 화이트 생강 쿠키를 먹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편안하게 일하고 있다. 모험을 감수하기엔, 잃을 것이 많았다. 넥스노트를 인수하지 않는다고 회사가 망하진 않는다. 넥스노트는, 지금은 성장하고 있을지 몰라도,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때 빈집털이하듯 인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리하지 말자.

담당자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사내 정치질도, 사외 이슈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오후가 천천히 반으로 접히고 있었다.

속 시원하고 뿌듯했다. 할 말은 다 하고 왔다. 상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스스로에게 칭찬을 안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감이 좋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곧장 대표실로 향했다. 막 방에서 나오는 웨일과 마주친 라선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잘 됐어요?"

"아마도요. 연락 주겠다고 했어요."

"기다려 보죠."

자신의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듯 보이는 웨일의 대답에 라선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티는 내지 않았다. 이런 건 행동과 결과로 증명하는 거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담당자의 답장은 느렸다. 아니 오지 않았다. 금방 NDA를 쓰고, IM을 달라고 할 줄 알았다. 처음 답도 느렸으니, 이게 담당자 스타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M&A라는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3일을 넘어가는 건, 업무적인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라선의 제안은 씹힌 것이었다.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올 답이 분명하게 보였다.

3일째 오후 다시 메일을 보냈고, 퇴근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에 약하게 화끈거렸다. 당당했던 만큼 초라해졌다.

저녁으로 시리얼을 꺼내 그릇에 부었다. 우유가 떨어져 수돗물에 섞어 먹었다. 밍밍했다. 흐물흐물 변하기 전에 물을 먼저 마시고, 천천히 알맹이를 씹었다. 약간 젖은, 그러나 아직은 바삭한 식감이었다.

한밤중에 목 안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에 깨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땀에 젖은 채, 여린 통증과 함께 밤의 허리에서 눈을 뜨는 게 잦았다. 좋은 일이 있을 땐, 좋아서 깼고, 나쁜 일이 있을 땐, 나빠서 깼다. 그러니 깨어나는 것만으로는 지금은 좋은 상태인지, 나쁜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내일 출근해 메일함을 확인하면, 확실해질 것이다.

그리고 불안감은 구체적인 언어로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귀사의 제안은'으로 시작하는 메일이었다.

이번에는 꽤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었다.

웨일에게 전하기 민망했다.

화장실로 가 거울을 봤다.

"어디 안 좋아요?"

이마에 땀을 닦고 있을 때, 세안나가 물었다.

"그냥, 조금 열이 있네요."

"M&A 때문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좋게 생각해요. 선입견 가지지 말고."

사모펀드를 두고 얘기하는 것일 테다.

"그냥 더 나은 조건을 찾고 싶었던 거예요."

"실망하지 마세요. 더 나은 곳에 거절당해도. 더 나은 곳이라 거절당한 거니. 당연한 거예요."

세안나는 이미 눈치 챈 듯했다.

손을 뽀득뽀득 씻고, 라선은 웨일에게 갔다.

"NK에서 매각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니, 너무 상심 말아요."

웨일이 건조하게 위로했다.

"DA 인테스트먼트와 미팅을 잡았어요. NK에 보여줬던 TM을 다시 같이 보면서 보완할 점을 찾아봐요."

DA인베스트먼트는 어떻게든, 무슨 방법으로든 기업 가치를 높여, 되파는 약탈적 경영으로 유명했다. 노동계가 비판하는 대표적인 '나쁜 예'였다. '노동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련되고, 효율적인 회사 경영에 방해되는 인원은 가차 없이 잘랐다. 과감한 조치를 하는 이유는 더 나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명한 사명 아래에 개인의 안녕은 소모품이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생을 마주하는 간절함의 색이 달랐다. 그것뿐이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곧장 왔지만,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바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도 편한 기분이 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돌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들렸다. 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아는 그 아이스크림들이 아직 있는지 보고 싶었다. 라선이 좋아하는 제품들은 곧잘 사라졌다. 대개의 경우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것들이었다. 스치는 구경 하다 쑥팥바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을 밀어, 청색 쑥팥바를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들었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방생해 줬다.

이리저리 근처 골목에 무슨 가게 있는지, 새로 생긴 가게가 있는지 기웃기웃 거리다가 마침내, 결국 집 문 앞으로 돌아왔다. 열어야겠지. 들어가야겠지. 씻고 어서 자야겠지. 그래야 개운한 몸으로 출근할 수 있으니까.

하루를 마무리하고, 엉터리 마음으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웠다. 폭포처럼 피로가 쏟아졌고, 바닥으로 몸이 꺼질 듯이 가라앉아다.

어디선가 날개가 나와 덮어주었고, 고양이가 머리를 보듬어 주었다.

악몽을 꾸기 쉽지 않은 조합이었다.

이미 한 번 버림받은 TM을 보완하느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분주하게 남은 일주일을 달렸고, 한숨 쉬고 나니 주말에 도착했다.

어김없이 라선은 고등학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러닝 코스로 향했다.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달린다지만, 머릿속은 뛸 때마다 헝클어졌다.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이 가까워져 왔다. 오늘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집을 사기 전에, 마치 그 집에 사는 것처럼 오고 가고 해 봐야 한다고들 했다.

M&A에 성공해, 지분을 현금화하는 것이, 라선이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을 매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안나의 말처럼 어디든 파는 게 중요하다. 호흡이 가빠졌고,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신축이 조경이 잘 되어있다고는 해도,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은 지나칠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도심 속의 휴양지라는 타이틀은 과장이 아니었다. 세안나와 함께 갔던 삼호 펠리스와 비교해서도, 환경 면에서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미래적인 디자인의 타원형 정원을 돌아서 나왔을 때, 맞은편에서 나무를 보면서 걷는 여자가 보였다. 나뭇잎을 세는 것처럼 유심히 바라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라선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리코였다.

"반가워요, 라선 여기 살아요?"

"아뇨, 그럴 리가. 그냥 아침 운동하러 나왔다가, 구경하러 왔어요. 워낙 잘 되어 있다길래, 얼마나 잘 되어 있나 궁금해서. 이런 곳에 사시다니 부럽네요."

"저도 여기 안 살아요. 음, 아직은요. 임장하러 왔어요."

임장하러 왔다. 의미가 달랐다. 리코는 정말 매매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리코는 현금만으로 매수할까. 아니면 대출을 받을까.

"잘 만들었던데요."

"맞아요. 무슨 수목원에 온 줄 알았어요."

"조경 말고 앱이요."

리코가 휴대폰을 보여줬다. 임장고고 앱이 켜져 있었다.

"요즘 집 보러 다니는데, 이거 없었으면 손 좀 고생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감사해요. 돌아가서 전할게요. 모두한테."

"기획은 라선이 주도하잖아요. 매 변곡점에서 아이디어 끌어올리는 게 라선인 거 알아요. 웨일이 자랑 아닌 자랑을 하거든요. 일종의 IR이겠네요. 웨일이 인센티브 주고 있어요?"

"인센티브는 다 같이 받고 있죠."

"야박하네, 그러다 라선이 박차고 나가면 잘 되던 M&A도 도루묵 될 텐데."

"그럴 리가요."

"충분히 그렇죠. DA 인베스트먼트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요?"

대주주니,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나름요. 최선을 다해야죠."

"최선을 다하는 걸로 부족해요. 결과를 내는 것까지가 최선의 테두리 안에 있어요."

리코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살벌하게 말했다.

"그렇게 힘이 없어서 물건 하나라도 팔겠어요. 이건 기업을 파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팔 수 있나요?"

라선은 반은 반발심에서, 반은 답지를 들춰보고 싶은 마음에서 물었다.

"저를 M&A 담당자라고 생각하고, 세 문장으로 넥스노트를 설명해 봐요."

갑자기 리코가 치고 들어왔다.

"넥스노트는 부동산 기반 자산 관리 플랫폼 임장고고를 운영하는 회사로, 현재 MAU는 350만이고 전년 동기 대비 600%로 성장했습니다. 사용자 중 임장고고 앱만 사용하는 비율은 62%이며 전체 사용자 중 2030이 차지하는 비율은 70%가 넘습니다. 이에 맞춰 타깃 광고가 들어가고 있고, 고유 클릭률은 72%입니다. 구매 전환율은 5%로 타 사 대비 2배 이상의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배너 광고를 광고주들의 만족도도 90%에 달하고 있습니다-"

"세 문장 끝났어요."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는 라선의 말을 리코가 잘랐다.

"말씀하신 내용에서 제가 뭘 얻었어야 했죠?"

"저희 기업에 대한 정량적 정보?"

라선은 자신이 전달한 바를 말했다.

"그 정보가 저한테 왜 필요하죠"

"기업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그런데 왜 흥미가 안 갈까요."

"수치가 매력적이지 못해서..."

라선의 말은 마침표를 잃어버렸다.

"아뇨, 매력적으로 수치를 전달하지 못해서예요."

리코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수치는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예요. 단순한 값이 아니라, 맥락과 방향성이 있어야 해요. 지금은 그냥 자판기 같았어요."

라선은 원 안에 갇힌 삼각뿔이 그려진 기하와 벡터 교과서를 떠올렸다.

"그래서 NK는 포기할 거예요?"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르면 안 되지.

"어쩔 수 없죠."

"NK는 계열사 중심으로 M&A를 진행하는 코코아랑 다르게 본사에서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M&A가 이뤄져요. 담당자를 설득했다고 해도, 갈 길이 멀죠. 그러니 처음부터 머리를 노렸어야 했어요."

"담당자도 겨우 닿았는데, 머리는 어림도 없었어요. 게다가 임원들을 제가 어떻게 상대하겠어요."

"임원이 아니라, 회장을 만나야죠."

"회장을 어떻게 만나요?"

라선은 반쯤 비현실적인 존재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아직 넥스노트에 공주님 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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