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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웨일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침 생강차를 들고 라운지에서 나오는 웨일에게 라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올 것이 왔다.
허니맨과 회의를 통해 결정한 연봉 협상의 마지노선은 20% 인상이었다. 지금 라선은 핵심 인력이다. 라선이 빠지는 게 얼마나 큰 타격을 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게 불가능한 경우엔, 서둘러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
웨일은 라선은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응접용 탁자에 앉고 나서, 라선이 입을 열었다.
"M&A 제가 준비해도 될까요."
뜻밖의 주제였다.
"물론 기획팀에서 같이 준비해 줘야죠. 백업 데이터를 충분히 탄탄하게 준비해야 하니까."
"아뇨 제 뜻은, 진짜 기업을 만나서 설득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웨일은 라선이 이렇게 나오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것까지 라선이 수고할 필욘 없어요."
선을 그었다.
"기회를 주세요. 가장 좋은 인수 기업을 찾았어요."
"어디요."
"NK요."
"NK 부동산이 아니라?"
라선의 눈에 확신이 차 있었다.
"NK 부동산 대신 저희가 선수교체로 들어가는 거죠. NK 부동산은 몇 년 동안 부진한 실적을 내고 있어요. 지금 NK 인베스트먼츠 안으로 흡수하려는 계획이라는 소문도 들려요. 우리가 NK 부동산보다 못한 건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무리수예요. NK 부동산이 부실하다고 해도, NK 계열사예요. 자기 다리를 자르진 않을 거예요."
"시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NK 회장이 올바른 경영자라면 검토 정도는 할 거예요. 밑빠진 독을 메울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
웨일은 고민했다. NK에 매각의향 비쳤다가, 거절당했을 때 손해 보는 게 무엇인지. 업계 평판이 낮아진다. 이미 한 번 버림받은 기업이 되는 것이다. 잠재적 인수 후보자들은 우리가 제시한 인수 조건이 과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다음 협상에서 불리한 지대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순 없어요."
단호하게 쳐냈다. 라선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결권을 행사하겠어요."
라선의 지분은 고작 6%였다. 행사한다고 무엇도 바꿀 수 없는 미약한 의결권이었다. 이건 단지 극렬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웨일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딱 한 번만 만나보세요. 매달리지 말고. 담당자는 알아요?"
"네!"
"그럼 결과 기다릴게요."
라선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담당자가 만나주기는 할까. 회의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느껴야 비로소 잠잠해질 것이다. 미리 꺾을 필요가 있었다. 빚 진 기분을 들게 하면, 잡아둘 수 있다. 웨일은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매각 전 상품의 품질을 최대로 유지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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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언장담하고 나왔지만, 팔이 떨렸다. 지르긴 질렀는데, 이걸 어쩐다. 안다고 말한 담당자는 초율이었다. 초율이라면 한 명은 알지 않을까.
-알긴 알죠.
"혹시 소개해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NK에 넥스노트 매각 제안하려고."
-네-에?"
"NK 부동산이 제 역할을 못 다하고 있으니, 새 바퀴로 갈아 끼우라고 제안하는 거지."
-그게 말이야 쉽죠. 아무리 그래도 계열사를 버리고, 새 회사를 인수하겠어요?
"NK 회장은 파격적인 인수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거야 큰 그림에 맞는 조각을 하나하나 모으는 거죠. 나눠서 보면 의외의 선택, 멀리 보면 놀라운 계획, 괜히 NK가 한국 제1의 테크 기업인 게 아니에요.
"넥스노트도 그 조각이 될 거야. 부탁해."
라선이 간절하게 말했다.
-한 대표님이 내린 결정 맞아요? 믿기지 않는데.
"내가 밀어붙인 결정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났다.
-저번이랑 다르게, 이번엔 진짜 제대로 준비해야 해요. 언니.
저번은 웨일 대신 엔젤윙즈에서 피치했던 걸 의미할 테다.
"물론이지."
-진짜 제가 언니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알죠. 제가 내일 연락해 보고, 괜찮다고 하면 명함 보내드릴게요.
짜증내듯이 말했지만, 누구도 싫어하지 못할 사랑스러운 말투였다.
"너밖에 없어. 초율아."
-잘 되면 한 턱 쏴요!
"응 그럴게."
아는 담당자는 해결되었고, 진짜 문제는 설득이다. 매혹적인 티저가 필요하다.
먼저 넥스노트의 재무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동안 프로젝트 기획 추진에 집중했기에, 이제 막 재무 개념을 들여다보고 있는 라선의 재무적 지식은 일천했다. 기존 피칭덱 자료는 웨일이 직접 주도해서 만들었다. 엔젤윙즈 사고 이후로 라선도 피칭덱 자료를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따라갔지만, 아무래도 웨일보다 이해도가 깊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회사 전반의 데이터를 확실히 소화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기획과 실행과는 다른 별개의 역량이 필요했다. 언제든 대신 발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은근히 안심했지만, 막상 실전을 대비하려고 보니, 부족한 면이 너무나 많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가장 기초부터 쌓아 올려야 단단해진다는 걸 알기에 결과로만 보던 EBITDA를 직접 계산해 보았다. 수치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의미를 파악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최근 3년간 EBITDA 변화 추이와 EBITDA과 매출의 비율, EBITDA와 매출 성장률 간의 관계를 하나씩 따져보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내부 직원이 분석하는데도 이렇게 시간 소요가 상당한데, 초율은 어떻게 NK 부동산 분석을 그렇게 빨리 끝냈을까. 놀라웠다.
지하철에서 유튜브로 Teaser Memorandum 잘 쓰는 법을 시청했다. 집에 가기 두 정거장에서 내린 라선은 구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실패하지 않는 M&A의 기술', '매각하는 자, 매수하는 자를 위한 안내서', "M&A 기업 가치 평가와 기업 재편", "M&A에서 승리하는 세 가지 방법" 등 300번대에서 구할 수 있는 M&A 관련 책을 모두 꺼내 열람실 구석 책상 위에 쌓아두고 자리를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읽는 속도가 더뎠다. 한 책에서 나온 개념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책과 오가며 지식을 겹으로 둘렀다. 할인된 현금 흐름 개념을 가까스로 삼키고 났을 때, 도서관 운영 시간 종료를 알리는 안내 방송과 노래가 나왔다. Tania Maria의 Euzinha였다. 대학생 때 재즈바에서 서빙 알바를 할 때, 즐겨 들었던 곡이었다. 흥겨운 라틴 리듬이 어깨 위에서 춤췄다.
머리는 무겁지만, 몸은 가벼운 상태로 집에 도착한 라선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답장을 마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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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부대표님
넥스노트 기획팀장 유라선입니다.
지난 인터뷰를 통해, NK 부동산의 비전과 사업 방향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심 끝에 현재 저의 경력과 상황을 고려하여, 부득이하게 NK 부동산과 함께 하긴 어렵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저보다 더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찾으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워지는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라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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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읽은 이심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쉽게 가려고 했는데, 쉽게 되지 않았다.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줄 알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납게 발을 구르고 있는 심찬을 보고 곧바로 다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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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초율이 NK M&A 팀 담당자 연락처를 주었다. 라선은 미팅 신청 메일을 작성해 보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거의 콜드 메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초율도 그리 친한 사이라고 했으니. 답이 올 거라는 기대는 최대한 볼륨을 줄여두고 일했다. TM 초고를 쓰고, 피칭 강의 영상을 보았다. 앉아서 하는 미팅이라도, 피칭과 같을 것이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견고한 논리로 설득시켜야 한다.
답은 그날 오지 않았다. 퇴근 직전까지 상대방의 수신 확인 상태는 읽지 않음이었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하루 더 번 것이라 생각하고, 도서관으로 가 공부했다. 걸으면서 오늘 공부한 내용을 머리로 복습했다. 새벽 2시까지 학습한 내용을 정리한 후 잠들었다. 답은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메일이 스팸메일함에 들어가 있어, 미처 보지 못했다고 담당자는 사과했다. 다음 주 금요일 오후 3시를 미팅 일시로 어떠냐고 물었고, 가능하다고 라선이 답했다. 이틀을 밤새서, TM과 IM 작성을 모두 마친 라선은 웨일에게 검토 요청했다. 웨일은 문서에 피드백을 달아 라선에게 보내고, 따로 불러 작성 방향에 대해 추가적으로 논의했다.
보석 세공을 하듯이 정보를 뗐다가 붙였다. 1캐럿짜리가 조금이라도 잘못 깎여나가면 몇 천만 원짜리가 몇 백만 원짜리가 난다. M&A에서는 억 단위가 날아갈 수 있다. 힘들게 얻어낸 허락이었다. 웨일의 승낙에 보답하기 위해, 사모펀드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거울 앞에서, 지하철 창문을 보며, 매 순간 연습하고, 모든 수치를 외웠다. 길 가다가 어깨를 부딪쳤을 때, '현재 MAU는 350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600%로 성장했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미팅 전날까지 고시생처럼 공부했다.
마침내 금요일이 되었고, 라선은 블루 팩토리를 찾아갔다. 두 번째 방문인지라, 처음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푸른 사원증은 멋져 보였다. 오기를 부려서 여기까지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라선은 안으로 들어온 순간 뒤에 있던 다리의 줄을 끊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9층에 도착해 회의실로 갔다. 담당자는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였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여기는 처음이시죠."
라선 면접 때문에 한 번 왔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개인사니까.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고 나서, 라선이 운을 띄웠다.
"이렇게 저희 회사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저희는 넥스노트를 인수할 기업을 찾고 있습니다. NK가 가장 적합한 기업이라 판단해 연락드린 거고요. 이건 저희 티저입니다."
라선이 클리어 파일에서 서류를 꺼내 전달했다. 담당자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넥스노트는 현재 MAU 350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600%로 성장했습니다. 사용자 중 임장고고 앱만 사용하는 비율은 62%이고 전체 사용자 중 2030이 차지하는 비율은 70%가 넘습니다. 이에 맞춰 타겟 광고가 들어가고 있고, 고유 클릭률은 72%입니다. 구매 전환율은 5%로 타 사 대비 2배 이상의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배너 광고를 광고주들의 만족도도 90%에 달하죠. 단순한 부동산 임장 앱에서 부동산 기반 금융 플랫폼으로 도약하는 단계에서, 앞으로 사용자 수는 더욱 증가하리라 예측합니다."
"CPM은 얼마죠?"
"만 원입니다. 가장 노출 효과가 좋은 혜택 탭 최상단은 만이천 원이고요."
설명을 들은 담당자는 추가적으로 질문을 계속 던졌다. 그때마다 라선은 봇물 터지듯 답변을 쏟아냈다. 45분 동안 입이 부르트도록 말한 라선은 혀가 얼얼했다.
"더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담당자가 웃으며 물었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실까요?"
라선이 되물었다.
"없습니다."
"더 묻고 싶으신 게 생기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라선이 가방을 챙겼고, 담당자가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나가는 라선에게 담당자가 말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화이트 생강 쿠키 드시고 가세요. 지금 시즌 판매 중이거든요."
NK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화이트 생강 쿠키에 집착하는 걸까. 의아해하면서 라선은 블루팩토리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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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이 가고 나서 담당자는 NK 부동산 사무실 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