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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퀵펜슬을 인수한 이유 중에 하나니까요."
고론이 NK의 딸인 걸 알고 인수했다고? 라선은 자신이 리코가 그린 그림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회장을 만나기 전에 라선은 저랑 연습 좀 해요."
"웨일한테 보고를 하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식 미팅을 잡고 피칭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부딪친 순간에 설득하란 뜻이에요. 필요한 정보는 루틴과 같은 동선 정도면 충분해요."
확신이 심긴 목소리로 리코가 말했다. 라선의 마음은 이미, 리코의 제안으로 기울고 있었다. 전 사장의 말을 들어도 되는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흐려지는 것인지, 분명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할 수 있는 일은 해보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끈적이는 죄책감이 속에서 울렁거렸다.
"어때요? 할래요?"
라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코의 교습소는 놀랍게도 이북동에 있던 허름한 태권도장이었다. 여전히 간판은 이북 태권도였지만 완전히 리모델링되어 외관도, 내부도 모두 전혀 허름하지 않았다. 리코가 '인수'하고 바꾼 것일 테다. 불시착한 이방인이 된 기분으로 라선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도복을 입은 리코가 몸을 풀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유연했고, 어울리게 민첩했다.
"퇴근하고 바로 오느라 고생했어요. 대신 저녁을 살게요. 물론 연습하고 나서."
라선에게 리코가 도복을 가져다주었다. 피칭 연습이 아니라, 태권도 연습을 하는 건 아니지?
"갈아입고, 스트레칭부터 해요."
설마가, 설마였다. 리코는 친절하게도 몸풀기 동작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달리기로는 길러지지 않는 유연성을 리코가 사지에 주입해주고 있었다.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면서도 군말 없이 따랐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나서 리코가 보호구를 라선에게 입혔다.
"기분이 어때요?"
"이상해요. 이게 뭐 하는 거죠?"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취권도 아니고, 피칭을 태권도 보호구를 입고 배워?
"라선은 여유가 없어요. 숫자에 맥락과 방향성은 지금 라선의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채울 수 있어요. 그냥 몰랐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감을 잡았다고 해도, 지난번처럼 끈 풀린 보따리처럼 다 쏟아내면 의미가 없어요. 어색하고 낯선 감각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웃음기 없이 리코가 지적했다. 리코가 짚어주기 전에는, 자신이 상황에 쉽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더라도, 모르고 싶었다.
"알아요. 지금 바보 같이 느껴지는 거. 이 바보 같은 기분으로 스타트업 CEO는 매일 같이 발차기하고 있을 거예요. 적어도 전 그랬거든요. NK 회장은 뼛속까지 앙트레프레너예요. 예전에 콘퍼런스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NK 회장은 자신과 동류가 아닌 사람의 말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아요. 즉 그냥 직원의 목소리로는 전혀 먹히지 않을 거예요. 같은 정보를 전해도, 태도에서 드러나요. 이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
살아있는 눈빛, 단단한 목소리, 펴진 어깨. 리코는 온몸으로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준비됐어요?"
"뭐든요."
각진 대답을 뱉고, 복부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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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론, 주말 잘 보냈어요?"
"응! 완전 좋은 날씨여서, 집에서 뒹굴거렸어! 너무너무 행복했지 뭐야! 라선은 잘 보냈어?"
"네, 완전 좋은 날씨여서, 한강을 좀 달렸어요."
"부지런도 해라!"
나름 좋은 날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야무지다니까. 고론이 감탄했다.
"언니 혹시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무슨 일이야?"
"우선 자리를 바꿔요."
고론은 라선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쪽으로 갔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었어요."
라선은 고론의 팔을 잡고, 회사 맞은편 맥주대낮으로 데리고 갔다. 맥주를 대낮에 마시는 낮술 맛집이었다. 말술인 고론이 애정하는 곳이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가서 이따금 마시고 오곤 했다. 무취, 무향인 보드카는 들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었다고? 팔이 떨렸다.
"너 설마, 나 여기서 술 마시고 일한다고 사람들한테 말한 거 아니지?"
"네?"
"나 여기서 점심 시간에 종종 나와서, 보드카 마신단 말이야. 이거 소문나면, 잘릴 거야."
고론이 거의 울먹였다.
"아닌, 아무도 모를 거예요. 저도 몰랐으니까."
고론은 억울했다. 자백을 하다니.
"중요한 건, 보드카를 안 마셔도 해고당할 수 있어요. 회사가 사모펀드에 넘어가면요."
"회사가 사모펀드로 넘어가? 왜?"
"지금 우리 회사를 인수할 만한 곳을 찾고 있어요. 그중에 한 곳이 DA 인베스트먼트예요."
"거긴 약탈자잖아?"
고론도 DA 인베스트먼트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높게 부르면 어디라고 해도 팔아야죠."
"DA 인베스트먼트가 잡으면, 구조조정에 들어갈 건데...그럼 나는?"
고론이 침을 삼켰다.
"반호랑 소배, 헬렌은?"
"다들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해요."
"내가 미팅에 나가서 다 엎지르고 오면 되는 거구나!"
"아뇨, 언니 아버님 동선 좀 알려줘요."
"동선을? 우리 아빠는 왜?"
"NK 회장님을 설득해 보려고요."
"넥스노트를 사달라고?"
"정확히 그런 셈이죠."
고론은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이런 기분이 싫어서, 아버지가 제안했던 경영직을 모두 거절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하는 일이 좋았다. 임장고고앱은 성장하고 있었고, 자신의 디자인이 시장으로부터 인정받는 게 좋았다.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NK에 인수되어야 하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냥 이대로 계속 가면 안 돼? 매각 안 하고 IPO까지."
"IPO가 엑시트의 정답은 아니에요. 좋은 인수합병이 오히려 IPO보다 나을 수 있어요. 대개의 평범한 회사에게는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론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보드카도. 고론은 보드카 한 잔을 시켰다. 라선은 쌍화차를 주문했다.
술을 받은 고론은 바테이블에 엎드렸다.
"아빠한테 빚지기 싫은데..."
"저한테 필요한 건 그냥 단 3분이에요. 절대 폐를 끼치지 않을게요."
간절한 목소리로 라선이 말했다.
자, 상황을 정리해 보자. 지금 회사가 사모펀드에 매각될 운명에 처했다. 사모펀드에게 매각되면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높은 확률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 나와 동료 중 누군가는, 고론은 몸을 떨었다. 여기서 잘리면, 꼼짝없이 NK에서 일하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 바로 밑에서.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넥스노트가 NK에 인수되면, 적어도 아버지 밑으로 가는 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지분 있으니, DA 인베스트먼트에 매각되어도 상관 없는 거 아냐?"
라선이 쌍화차를 한 모금했다.
"사실 저 넥스테이트가 백방에 인수되었을 때, 잘렸어요. 마음이 걸려요. 다들 계속 다닐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
솔직하게 라선이 말했다. 고론이 좋아하는 라선의 모습이었다.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좋아, 딱 3분 찾아볼게!"
시종일관 진지했던 라선의 얼굴이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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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론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NK 회장은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조선 호텔 31층 스카이 라운지 카페에서 혼자 카페 드 올라를 마신다고 했다. 다음 주 화요일이 되기 전까지 라선은 매일같이 리코와 만나 피칭 연습을 했다. 어색함에 내성을 기른 후, 수치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작업을 도와줬다. 그 이후엔 반복 훈련이었다. 처음에는 뭐 하나 싶었는데, 고기 겉을 살짝 태우고, 속을 촉촉하게 만드는 요리사처럼, 살짝 열받게 한 뒤, 속을 채워줬다. 길러지는 기분이었다.
주말 리코와 함께 조선 호텔로 답사를 나갔다. 실제로 회장을 만나는 것처럼 예고 없이 리코가 로비 안으로 들어오고, 라선이 자연스럽게 따라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걸 모의로 해보았다. 진짜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마침내 화요일이 왔고, 시차를 써서 2시간 일찍 회사를 나와, 경국동 혜단문 맞은편 조선 호텔로 갔다. 높은 층고의 호텔 로비는 마치 공항에 온 듯한 개방감을 줬다. 벽면에서부터 시작하는 민화는 시스티나 성당처럼 천장 전체까지 그려져 있었다. 라선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로비 중앙 소파에 앉았다. 나전칠기로 장식된 엘리베이터 문은 사람들이 내리고 탈 때마다 조개처럼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라선은 기사에 노출된 NK 회장의 얼굴을 다시 봤다. 연습했던 말을 다시 말하며 입술에 덧발랐다.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깍지 꼈다 풀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를 열 번 반복했을 때, 동편 회전문으로 NK 회장이 들어왔다. 고론이 알려준 대로, 혼자였다. 라선은 예행연습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맞추어 엘리베이터로 갔다. 먼저 올라가는 층을 누른 뒤뒤, 회장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회장도 함께 올라탔다. 라선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넥스노트 기획팀장 유라선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회장은 예의상 인사를 받았다.
"저희는 부동산 기반 자산 관리앱 임장고고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방과 같은 다른 유사앱이 350MAU를 달성하는 데 3년이 걸린 것에 반해 저희는 1년 만에 달성했습니다. 폭발적인 성장의 주축에는 트렌드 주도권을 쥐고 있는 2030이 70% 이상입니다. 자산관리 앱 중에 가장 젊은 앱이란 뜻이죠."
라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하네요. 좋은 팁이 있다면 알려주시죠."
자랑처럼 던진 말을 회장이 물었다. NK 페이 사용자의 2030 비율은 지난 2년간 변화가 없었다. NK가 그렇게 중요시 여기는 젊은 감각의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야 한다.
"제가 드릴 수 있는 팁은 이미 충성도 높은 2030층을 확보한 앱을 인수하는 것입니다. 타깃 광고의 구매 전환율이 타 사 대비 2배 이상으로 시장성도 검증된 앱을 추천드립니다."
20층
"구매 전환율이 수익과 직결되지 않을 텐데요."
"광고 단가가 시중보다 10%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사들의 재구매율은 90% 이상입니다. 한 단계 더 올라가면, 단가도 높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NK페이와 결합을 통해 플랫폼 영향력을 강화시켜 파이 자체를 키우는 거죠."
25층
"두 가지를 합친다고, 반드시 영향력이 커지는 건 아닐 겁니다."
"코코아 페이는 이미 아필을 인수했습니다. 단순히 금융 자산을 조회할 수 있는 기능으로는 개인의 금융 사이클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앞서 가야죠."
27층
"너무 늦지 않게...앞서 간다."
라선의 말을 회장이 따라 했다. NK의 자서전 '요란한 모험' 마지막 인터뷰에 자신이 한 말이었다.
29층
"잘 들었습니다. 훌륭한 피칭이네요."
30층
힘이 풀렸다. 여기서 끝인가.
31층, 문이 열렸다.
"그런데 한 가지를 빠뜨리셨어요."
아..또 뭘?
내적으로 절망하고 있는 라선에게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명함은 주셔야죠"
라선은 황급히 명함을 꺼내 주었다. 문이 닫혔고, 올라왔던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