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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표 자리를 맡아달라고?"
"네, 알다시피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해요. 리브랜딩 앱 론칭을 마무리짓기엔 버티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그래도... 네가 아니면 안 돼."
고론은 검지와 엄지만으로 라선의 팔을 잡았다.
"세상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어요. 회사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게다가 고론은 리브랜딩 TF를 이끌고 있으니 어느 사람보다 이해도가 높아요."
"내가? 그럴 리가. 절대로 끝까지 못 끌고 갈걸."
"론칭까지 코앞이에요. 이미 끌고 왔어요."
"아냐, 너 없이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
고론이 사정했다.
"리브랜딩이 성공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저란 걸 알죠. 그런 제가 내린 결론이에요. 믿어주세요."
라선이 고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할 때, 그 사이에는 여린 긴장감이 팽팽히 걸린다.
"할 수 있어요."
팔을 잡은 손가락을 고론이 흔들었다.
"병가 내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높은 확률로 죽을 거예요."
담담하게 라선이 말했다.
"설마, 그 정도야?"
"설마, 그 정도더라고요."
라선이 웃었다.
"그럼, 네 몸부터 챙겨야지!"
고론이 혼냈다.
"회사를 책임질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사무실에서 또 쓰러져야죠."
협박에 가까운 투로 라선이 고론을 몰고 갔다. 고론은 여렸다. 그러나 내몰릴수록 단단해지는 내력이 있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할게, 내가 해. 너 죽었다 깨어나도 죽을 생각하지 말고, 돌아와야 해. 알겠지?"
"한다고 한 거죠? 회장님께 보고 드릴게요."
회장님께 보고 드린다는 말에 고론이 조금 어두워지는 듯하다 고개를 털어내고, 다시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응!"
고론은 라선은 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기를 다독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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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면담을 신청한 라선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로 들어갔다. 회장은 예의 인자한 얼굴로 라선을 맞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장님."
"무엇인가요?"
"대표직을 내려놓아야 할 듯합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회장이 바라보았다.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이 적합한 사유가 아니라는 듯이, 회장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했다. 예상했다. 어느 회장도 리브랜딩한 앱을 론칭하는, 가장 결정적이 순간에 대표가 이탈하는 것을 반기지 않을 테다. 침을 삼키고 라선이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림프종을 발견했습니다. 4기에서도 조금 더 진행되어, 수일 내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높은 가능성으로요."
회장은 여전히 라선의 건강이 아니라 회사의 건강을 생각하는 듯했다. 걱정을 치워주기 위해 라선이 빠르게 덧붙였다.
"대표의 부재는 기업의 신뢰도에 큰 타격입니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차기 대표로 이한비 팀장을 추천드립니다. 현재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으며 임장고고 앱 개발에서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인재입니다. 리더십도 있고, 통찰력도 있습니다."
"한비가 내 딸이라서 추천하는 건 아닐 테죠."
"물론입니다. NK 페이에셋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나오길 기대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훌륭한 대표가 임명되어야 하고요. 지금 시점에서 외부 인사를 들이는 건, 출시를 지연시키기만 할 것입니다. 내부 인원이 올라가면,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모로 이한비 팀장이 대표가 되었을 때 얻는 이득이 많습니다."
"현 대표의 급작스러운 사임이 미칠 손해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일까, 확신이 안 서네요. 한비는 강단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라선은 사죄했다. 자신의 병과 죽음이 회사에 경제적인 타격을 미친다는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악한 장난감 같았다.
"아니에요. 건강이 제일 중요하죠. 사임은 수리할게요. 후임자는 고민해 봐야겠네요."
"한비 팀장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작지만 꽉 찬 목소리로 라선은 다시 주장했다.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찜찜한 상황에서 나오기는 싫었다. 책임감 없는 것 같아서. 책임감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인터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평가자들이 유 대표와 같은 결론을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유 대표가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가 확고한 사실이라면, 같은 걸 발견하겠죠."
부드럽게 회장이 말했다.
"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면담이 끝났고, 회장을 따라 라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회장이 말했다.
"치료를 끝내고, 건강해지길 기도하겠습니다."
가볍게 라선이 목례를 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라선이 사임을 발표하고, 임직원들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안나를 제외하고는. 세안나는 라선의 마지막 출근날, 사무실을 떠나는 라선을 향해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펴고 손을 흔들었다. 임장고고 캐릭터 제스처 중에 하나인 하와이안 샤카였다. 느긋하게 해. 잘하고 있어. 걱정 마. 약속하는 손 모양을 닮은 샤카에는 무해한 응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라선도 샤카로 응답했고, 블루 팩토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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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와 타아와는 라선이 없는 라선의 집에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경제의 신은 전능(全能)하지 않다. 경제의 천사에게는 치유의 능력이 없다. 시장에 흘러 들어가는 유동성도 관리하지 못한다. 경제의 천사의 기본적인 업무는 모니터링이다.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기록하고, 회복하는 것을 기록하고 데이터를 모은다. 민하는 그동안 라선 곁에 머무느라, 경제부로부터 경고를 세 차례 받았다. 민하가 수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경질 당해, 실직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경제의 신에게는 애호의 감정이 없었다. 경제의 신은 그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었고, 그 흐름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다. 라선의 특수한 사정을 봐준 것 또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였고, 튀어나간 물줄기들은 다시 거둬들여진다. 버림 받아 좌천된 타아와의 개입 덕에 일이 조금 더 복잡하게, 더디게 꼬였었다. 지금 한참 꼬았던 고무줄의 끝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빠르게 팽이처럼 돌면서 줄이 펴져갔다.
"잘 챙겼지?"
민하가 타아와에게 물었다.
"물론"
타아와가 위임장과 자신의 신분증, 매매 계약서 원본, 라선의 신분증, 주민등록등초본, 가족관계증명서, 인감 동장, 인감 증명서를 차례로 보여줬다.
"그 모습으로 가게?"
"깜빡할 뻔했네."
소년과 노인의 모습이 섞여 있던 타아와는 신분증 상에 있는, 소년과 노인 사이의 얼굴로 바꾸었다. 머리카락 색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민등록증과 실제 모습 차이보다는 훨씬 더 미묘한 차이였다.
준비물을 모두 챙긴 민하와 타아와는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양복 차림의 매도인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부동산 중개사가 물었다.
"유라선 씨 대리인으로 왔습니다. 이쪽은 법무사 분이시고요."
타아와가 위임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지금 들으셨으니, 됐습니다."
민하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매도인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지루한 일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것 같았다.
중개사가 당일에 출력한 등기부등본을 보여주며 근저당설정, 가압류, 가등기 등 권리관계가 추가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매도인의 인적 사항이 서류와 일치하는지 대조하고, 인감증명서와 인감도장이 같은지 살폈다.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럼 이제 잔금이랑 선수관리비 입금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안내를 마친 중개사가 타아와에게 말했다. 타아와가 폰을 꺼냈다.
"이체 완료했습니다."
"아, 네 왔네요."
도착했다는 알림을 보지도 않고, 매도자가 말했다.
"네, 그럼 여기 부동산거래계약 신고필증도 챙기시고 오늘 중으로 등기 이전 마치세요."
"걱정 마십시오."
민하가 서류를 받아 들며 말했다. 타아와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렸고, 민하가 팔을 잡아끌고 부동산 사무실을 나왔다. 소년과 노인이 섞인 모습이 된 타아와는 곧바로 고양이가 되어 민하의 어깨에 올라탔다. 둘은 취득세를 납부하러 구청으로 갔다.
"어, 돈이 모자라는데..."
타아와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너 집에 묶인 보증금으로 내려고 한 거 아냐?"
"아하."
"너 혹시 없냐?"
"그럴 리가, 심장으로 담보 대출 받아 뒀었는데, 깜빡했네."
타아와는 자신의 계좌에서 돈을 이체했다.
마지막으로 둘은 등기소로 가 소유권이전등기를 신청했다. 일주일 뒤면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111동 1504호의 소유주는 '유라선'으로 변경된다.
"너 이러다 진짜 날개 떼이는 거 아냐?"
타아와가 걱정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 있으면 알려주라."
날개를 활짝 펴며 민하가 날아올랐고, 타아와는 민하의 어깻죽지를 이빨로 물었다. 천사의 어깨 매달린 고양이는 흔들거리며 비행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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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세상은 티 없이 맑았다.
창틈 사이로 깃털 하나가 떨어졌다.
피가 천천히 몸안을 천천히 돌았다.
시간이 감기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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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태권도|
세안나는 검붉은 태권도장 간판을 쳐다보았다. 수업을 끝내고 나온 아이들이 민머리 여자를 흘깃흘깃 보았다. 뭘 보냐는 눈으로 아이들을 째려보았고,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도망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세안나!"
리코가 밝게 인사했다.
"반갑네요. 리코. 은퇴하고, 계속 도장 운영 한 거예요?"
"네. 세안나도 등록하러 온 거죠? 들었어요."
"아, 그냥 오늘은 맛보러 왔어요."
"그럼 먼저 2층으로 가 봐요. 전 여기 정리해야 해서요. 세온아, 기구 옮기는 거 좀 도와줄래?"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덩치 좋은 남자애가 리코의 말을 듣고 다가와 전자식 타격기기를 하나씩 들어 옮겼다.
리코와 인사를 하고, 세안나는 관장실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과 달리 2층은 사무실로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세피로트의 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가장 위에는 'Bibliotheca'라고 적혀 있었다. 메일로 안내 받았던 사명(社名)이었다. 가지마다 새겨진 단어를 훑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무슨 이런 데 사무실을 차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외침의 주인공은 키득거렸다.
"당연하지, 이런 데 사무실을 차리면, 누가 입사하고 싶겠어요."
"오늘 입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인터뷰하는 거 봐서, 할 거예요."
"아하, 세안나가 우리 회사를 인터뷰하겠다는 거죠."
"네."
"좋아요. 그럼 시작해 봐요."
세안나가 의자 앉았고,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