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첫 등교거부를 한 것이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다.
첫 등교거부를 접하고
한참 동안, 말 그대로 '오지게' 쓰라렸다.
세상의 어떤 일이건 안 그렇겠냐마는
등교거부 역시 겪어보지 않고는
그 아픔의 깊이를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내가 겪었던 아픔이라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은 가능하겠지만,
듣는 사람에게 그 아픔에 대한 이해까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누군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거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글을 써내려 간다.
첫 등교 거부로부터 두 달 여가 지난 지금.
우리 아이는 3주째 씩씩한 학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한 문제 해결이라는 표현은 아직 이르다.
아이의 불안은 옮겨 갔지만,
받아들이는 엄마가 달라졌다.
아이는 현재까지는
더 이상 학교에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학교를 향하는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졌고,
친구들과의 등굣길 장난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매일 산 정상에서 '감사!'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진심으로 감사하고 더 바랄 게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이가 온전히 안정을 되찾았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말 대신,
매일 여러 번씩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있다.
"엄마 태권도 끝나면 데리러 나올 거죠?"
"응 그럼."
"엄마 이 이야기 또 해서 미안한데,
엄마 내일 태권도 끝나면 꼭 나오실 거죠?"
"당근이지."
"엄마 다른 자동차 옆에 서 있지 말고, 제가 내릴 때 잘 보이는 곳에 있어주세요."
"그래~"
하루에 최소 서너 번 이상은 같은 질문을 한다.
사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을 받아내는 작업이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게 무서워서 그렇다는데,
처음엔 반복되는 질문과 답변,
도돌이표 같은 대화가 참 어려웠다.
'아, 또 시작...'
그렇게 결국 아이에겐 짜증 섞인 대답을 하곤 했다.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니~"
아이를 향한 짜증 속에는
아이를 향한 원망과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대체 왜 너만 이렇게 유난스러운 거냐고...'
엄마도 사람이라
그러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두 번의 상담을 받고,
생각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왜 우리 아이만..'이라는 생각을 서서히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시작했다.
(비교가 당연한 이 사회에서 자란 저에게는
정말이지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ㅠㅠ)
왜 우리 아이만 그럴까?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마음은 몇 백배 더 편안해진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아이가 지금 조금 불안하구나.'
하며 아이의 불안을 인정해주면
엄마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훨씬 편안해진다.
아이가 불안한 것은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다.
성인도 특정 상황에 놓이면 불안할 수 있다.
성인은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혹은 도망치기도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불안을 이겨낸다.
아이도 현재 그 불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풀어나가는 중인 것이다.
그저 받아들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면-
아이의 불안에 대해서는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돕는 편이 낫다.
아이가 겪는 불안은
신뢰와 따뜻함을 쌓는 것으로
대부분 해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이의 등교거부나
엄마와의 불안정 애착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라면,
그것을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꼬여들어간다.
"그만 좀 해!"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서 해 봐야 해."
"꾹 참고 해 봐."
분명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제안은 맞지만,
아이가 불안의 동굴에서 허우적거릴 땐
되도록이면 쓰지 않았으면 하는 말들이다.
아이가 불안할 땐
'아이의 불안을 인정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만큼
빠르고 안정적인 해결방법은 없다.
아이의 불안도,
분리불안증도 결국에는 끝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부모가 아이 곁에 머무르길 원하더라도
아이는 부모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가게 되어 있다.
끝이 있는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맡겨 두면 된다.
아이가 곁에 있고 싶어 한다면 함께 곁을 지키고,
아이가 엄마를 꼭 끌어안고 싶어 한다면
아이의 요구보다 더 오래 더 따뜻하게
끌어안아주면 된다.
없는 성품을 만들어내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태초에 부여받은
'모성'을 그대로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아이의 학교 부적응에 대해서는
이 글이 마지막이었으면 하지만.
아이의 학교 부적응과
분리불안증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를 보며
많은 이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너무 그렇게 유난 떨지 않아도 괜찮다고.’
‘엄마가 너무 과잉보호하는 게 아니냐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엄마는
또 한 번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하 또 내가 서툴렀구나.’
그리고 아이의 문제 앞에서 허둥대기 시작한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내치기도 했다가,
아이를 살살 달래
손을 붙잡고 중앙현관까지 같이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가,
이랬다 저랬다 팔랑귀 엄마가 된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타인의 말에 대해 그렇게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른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춰 아이를 키워내면 되는 것이다.
팔랑귀 엄마가 되는 순간,
내 아이가 너무 힘들어진다.
내 아이를 진심으로 건강하게 키워내고 싶다면,
나를 믿고
내 아이를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정말 힘들 땐,
아이 몰래 실컷 눈물을 훔치는 것도 괜찮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남편을 붙잡고
끝도 없는 하소연을 하는 것도 때론 위로가 된다.
그리고 마음이 닿을 땐 간절히 기도로 구하는 것도 좋다.
대신 아이를 만나는 아침이면
밝고 씩씩한 엄마로 돌아와 주는 게 좋다.
(나도 해봐서 안다..) 어렵겠지만,
아이가 온전히 의존하는 그대가
잘 버티고 서 있어 주어야 아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부디 당신이 잘 버티길 바라고,
당신의 아이가 씩씩하게 잘 일어서 주기를 바란다.
아이의 학교 부적응에 대해서는
이 글이 마지막이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이 이야기의 끝은 알지 못한다.
그저 지금에 감사한다.
만약 비슷한 일을 또 겪어야 한다면....
또 겪어야겠지.
우리는 힘을 합쳐 한 고비를 넘긴 단단한 팀이니,
다음번 파도가 덮쳐와도
거뜬히 그 파도에 몸을 맡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