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만들어지는 소설입니다.
쭈욱 기다렸다가 몰아서 읽으셔도 좋고, 짤막짤막하게 아쉬워하며 읽으셔도 좋습니다.
그저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
(지난 이야기의 후반부)
긴 생머리 그녀와 나머지 멤버들과의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 틈에 그녀의 이름을 알아낸다. ‘안드레아’.
식사를 하는 중에도 음식을 잔뜩 구겨 넣고 떠드는 이는 아나뿐이다. 셀레네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안드레아는 한 번 씩 억지웃음을 지어주며 식사를 이어갔다. 적극적인 호응을 하느라 도시락을 절반도 먹지 못한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도시락을 모아서 폐기함에 넣는 일까지 마치면 오늘의 공식 일과는 마감이다.
멤버들이 도시락을 한 곳으로 막 모으기 시작하는데 안드레아가 갑자기 휘청 하더니 자기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호흡은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쓰러진 건가? 갑자기 쉬는 건가?’
판단할 새도 없이 아나가 복도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푸른 가운을 걸친 의료진을 둘이나 데리고 우리 방 쪽을 향해 달려오다시피 한다. 늘 한 박자 씩 느린 나는 그저 안드레아와 의료진들만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
의료진들은 그녀를 흔들어 깨울 생각도 않고 등쪽으로 청진기를 대 보고는 안심하라는 듯한 투로 한 마디를 건넨다.
“기면증을 앓고 있는 것 같네요. 일단 조금 더 자도록 둬 보고 환자분이 일어나시면 정확하게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일어나실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기면증이라….
어느 신문기사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 말이다. 기면증! 일상생활을 하다 말고 픽픽 쓰러져서 잠이 들 수 있는 말 그대로 스스로 잠을 조절할 수 없는 병이라고 했었다. 안드레아가 처음 만났을 때도 갑작스럽게 잠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녀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안드레아라는 인물에 대한 풀리지 않던 작은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져 나가기 시작했다.
의료진의 말대로 안드레아는 곧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안녕을 물었고 그녀는 부스스한 눈빛으로 자긴 괜찮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짐 정리를 마친 아나가 그런 안드레아를 그냥 둘 리가 없다.
“안드레아, 기면증! 기면증이라는 거 알아? 실은 아까 네가 밥을 먹고 나서는 갑자기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었거든. 의료진들이 급하게 달려와서 너를 진찰했는데, 기면증이 아닌가 의심하더라고. 특별한 조치를 취하진 않고 그들은 다시 진료실로 돌아가긴 했는데, 우리는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어. 혹시 기면증이라는 걸 아는지.”
“응 잘 알고 있어. 별일 아니야. 괜찮아. 가끔 그렇게 잠이 들어. 금방 깨어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금방 깨어나긴 하던데, 같이 있다가 깜짝 놀랐잖아. 왜 그러는 거래? 약 같은 건 먹고 있는 거야?”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처음 알게 되었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이야. 소묘를 하고 있었어 각자 가져온 과일이니 담뱃갑이니 하는 것들을 그리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든거지. 덩치가 산만했던 미술 선생님이 놀라서 허둥지둥 나를 업고 보건실로 내달렸는데, 그 사이에 내가 잠에서 깨어난 거야. 자초지종을 들은 보건 선생님이 일단은 병원 진료를 권하셨어. 그리고 지루했던 검사들을 받고 나서야 ‘기면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지.”
“너도 알고는 있었구나. 난 또 오늘 처음 쓰러진 건 줄 알고….”
“부모님은 나를 치료해 주시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셨는데, 기면증이라는 게 워낙에 뚜렷한 원인도 없고 현재 로써는 치료법도 없어서 최대한 생활 반경을 줄이고 조심하면서 살고 있어. 이것 때문에 아직까지 큰 사고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서 나는 뭐 적당히 적응해서 살아가는 중이야. 다만 중간중간 쏟아지는 잠이 극성이라 가끔 밤잠을 설칠 때가 있어서 그렇지 뭐 그리 대단한 병은 아니야.”
“그랬구나. 태어나서 처음 본 광경이라 놀랐는데, 혹시 내 반응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나가 안드레아의 마음과 입을 열게 만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아이였지만 아나라는 아이는 참 대단했다. 몇 마디 하지 않고서도 저렇게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게 하다니, 안드레아의 기면증 스토리보다 안드레아가 편안하게 대화를 시작하게 한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셀레네는 이 별난 상황에서도 혼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느라 정신이 없다. 쌍둥이라고 해서 꼭 닮아야 하는 법은 없지만 아나와 셀레네는 별스러울 정도로 많이 달랐다. 셀레네는 여기 있는 누군가가 피를 쏟으며 들것에 실려 나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제 좀 잠잠해지나 했더니 아나가 안드레아의 개인사를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넌 대체 어디서 나타났으며 무얼 하다가 이 방구석에 앉아 나를 마주 하고 있는 거냐며 원색적인 질문을 쏟아부었다.
눈물만 훌쩍이던 안드레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도 홀린 듯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아나의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