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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아동 병원 509호

폐렴 아기 입원 생활기

by 다니엘라

오전 6시 30분.

아침 첫 체온을 확인하고 아이가 밤새 잘 잤는지 확인을 하러 들어온 쾌활한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눈을 뜬다. 다섯시 반에 일어나 새벽 글을 좀 쓸까 했는데 오래오래 울리는 알람을 부지런히 손을 놀려 끄기를 반복하며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그녀의 쾌활함에 벌떡 일어나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옆에서 곤히 자던 우리 아기도 (정말이지 망설임 없이)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난다.

"어머, 아가 왜 벌써 일어났어?" 하시는 간호사 선생님이 진짜로 몰라서 묻는 것인지 되묻고 싶어졌지만 "그러게 이든아...." 하며 그녀의 말에 맥없이 동조하고 만다.

우리의 하루는 6시 30분에 상쾌하게 시작된다. 일단 밤새 가뒀던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아침 공기를 방안에 가득 채우느라 창문부터 연다. 복도에 잠시 나가보니 다른 병실의 아가들은 아직 한밤중인지 나른함이 공기 중을 떠다닌다. 우리 아기가 좋아하는 모닝 분유를 건네고 아기의 컨디션을 살핀다. 어제보다는 한결 나아 보이지만 아직까지 보글보글 폐 소리가 좋지 않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수포음이 들리는 걸 보면 폐렴이 심하긴 한 모양이다.

잠시 아기와 놀아주고 있는 중에 아침밥이 배달된다. 아프고 나서 통 먹지를 않는 아기가 밥에 관심을 갖길래 쌀 몇 알을 집어주고 집에서 챙겨온 이유식을 데워본다. '이번만은 먹어주기를...!!' ... 괜히 데웠다. 세 숟갈쯤으로 아기는 식사를 끝내고 나는 그런 아기 곁에서 아침 식사를 끝낸다. 아침을 조금 먹였으니 아침 호흡기 치료를 하고 아침 약을 먹이고 세수도 해주고 등등


그랬더니 아기가 갑자기 졸림 경보를 보낸다. 8시. 아기가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난다. 그 사이에 샤워를 하고 털끝만큼의 여유를 부린다. 아홉시 반엔 유튜브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고 아기와 중간중간 놀아준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허리가 살살 아픈 것 같고 졸음도 몰려오고 심심하기까지 하다.


아기와 옥상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라고 쓰지만 나만 산책을 하고 아기는 아기 띠에 대롱대롱 매달려 반짝이는 세상 구경을 한다.) 오전과 비슷한 오후를 보낸다. 아기가 자는 틈에 책을 반권 정도 읽어내고 작은 과자도 두봉 꺼내 먹는다. 오전과 비슷한 오후, 그리고 또 한 번 더 비슷한 저녁을 보낸 후 할 일이 없으니 아기를 일찌감치 재운다.

심심하다니.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내 인생에도 심심함이라는 게 존재해 있었던가.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심심함이라는 상태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탁탁 털고 오롯이 그것을 느껴본다. 심심하다 심심해. 아기가 어리니 티브이를 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기 옆에서 몰래몰래 넷플릭스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며 심심해하며 아기와 함께 놀아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이렇게 글 쓸 에너지도 남은 걸 보니, 집안일 없고 밥 안 차리는 세상이.... 정말로 경이롭다.

아프고 불편해서 낑낑대는 작은 사람 비위를 맞추고 약 먹이고 호흡기 치료하고 재우고 먹이는 일련의 과정들이 쉽다는 말은 분명 아니지만, 본성이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머슴이다 보니 나에겐 지금 이런 시간이 꼭 한번 필요했던 것 같다. 멍도 때리고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어보기도 하는 상황들을 겪는 것 말이다. 게다가 남편과 우리 아이들로부터도 한 발짝 떨어져서 잔소리하지 않고 눈 딱 감아주는 것, 그것이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이곳에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충분히 멍 때리고 읽고 쓰고 쉬며 심심하게 보낼 것을 생각하니 약간은 기대도 된다. 자, 그럼 509호 이만 취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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