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숫자 뒤 뜨거운 장면들
세상의 많은 것들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시험 점수와 등수가, 사회에서는 연봉이나 재산이, 헬스장에서는 몸무게와 체지방률이 우리의 현 상태를 표현한다.
숫자는 차갑지만 명확한, 객관적인 지표다. 단순히 '좋다', '무겁다', '잘한다' 같은 말로 표현하는 대신 숫자를 대면 좀 더 빨리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 순서를 매기고, 등수와 등급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어의 number는 반드시 1, 2, 3과 같은 셈이나 순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뮤지컬에서 number란 한 곡의 노래, 나아가 하나의 장면을 뜻한다. 물론 작품 속 삽입된 곡들에 하나하나 번호를 붙이는 데에서 시작된 의미이지만, 이제는 '넘버'라고 하면 특정 숫자가 적힌 노래가 아닌, 음악이 표현되는 장면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도 이러한 number들이다.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 무대와 조명 연출 등 모든 요소들이 함께 모여 쏟아내는 장면들은 저마다 다른 매력을 지닌다. 노래가 가장 훌륭하거나 연출이 가장 독특한, 혹은 관객 저마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가장 인상적이었던 number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래서일까, 영어 표현 중에는 'do a number on someone'이라는 말도 있다.
The breakup really did a number on him. (그 이별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깊은 상처 혹은 트라우마 같은 것을 남겼을 때 쓰는 표현이다. 마치 강렬한 뮤지컬 넘버가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듯, 어떤 사건이나 사람은 때로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기기도 한다.
number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 강렬한 순간과 마음의 흔적을 모두 뜻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숫자를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건 수치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한 장면, 한 순간들이다.
결국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기억되는 것은 몇 등, 몇 점, 몇 등급이 아니다.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공연의 한 장면처럼, 진심을 울리는 순간, 아픔을 딛고 일어나 계속 나아가는 그 순간들과 서사일 것이다.
"Not everything that counts can be counted, and not everything that can be counted counts." (중요하다고 해서 모두 셀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셀 수 있다고 해서 모두 중요한 것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로 알려져 있는 이 말은, 세상의 잣대로 매겨진 number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말 중요한 건, 나를 표현하는 숫자들이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고 시간을 나누고 했던 그런 장면의 number들일 테니까.
number가 들어가는 표현들
do a number on someone/something: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에게 상처를 입히다, 엉망으로 만들다, 큰 영향을 미치다 (The flu did a number on me. 나는 독감 때문에 정말 고생했다.)
someone's number is up: (비격식적) 죽을 때가 되다, 끝장나다 (I thought my number was up. 이제 내 차례(죽을 때)가 된 줄 알았어.
run the numbers: 계산기를 두드려 보다, 수치를 상세히 분석/검토하다 (We need to run the numbers before before we start this business. 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수지타산을 따져봐야 한다.)
a numbers game: (질보다 양이 중요한) 숫자 싸움, 물량 공세 (Finding a job is often just a numbers game. The more applications you send, the better your chances. 구직 활동은 종종 물량 싸움이 된다. 지원서를 많이 보낼수록 합격 확률도 높아진다.)
get/have someone's number: ~의 정체(실체)를 파악하다, 속셈을 꿰뚫어 보다 (He tried to trick me, but I had his number from the start. 그는 나를 속이려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의 속셈을 다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