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논의 색 개와 땅 - 소설

창밖에


창밖에

운동장 너머

녹색 치마 앞 건물

가지치기한 나무 치마


구멍 나서

얼굴이 붉어.



논의 색


논의 색을 합한다고

까매지진 않아.


논의 빛을 합한다고

하얘지지 않고.


논에 앉는 눈

논에 댄 물소리


녹음과 그 변두리

그 속의 숨소리


그 위에 흐른 땀

황금색이야.



“맞아, 오늘은 너랑 닮아서 짜증 나는 놈한테 온 거야.”

오늘은 가을을 걸었어. 무슨 말이냐고? 말 그대로야. 지평선에 나타난 붉은 무언가의 정체는 가을이었어. 단풍이라고!


이곳은 가을 산이라는 곳이래. 초록 들판이랑 비슷하지만, 여기엔 가을 들판 위에 가을 산이 있어. 밀짚모자 모양이야. 푸른인 가을 들판을 다 지날 때도, 거의 다 왔단 말을 아끼고 있었지. 좀 의아했어. 봉긋이 솟은 산으로 향하면서, 설마설마했으니까.


(중략)


여긴 가을의 건조하고도 생생한 숨소리가 있으니까.


평지를 마냥 걷는 것과 산을 오르는 건,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 점점 멀어지는 가을의 풍경과 가까워지는 가을의 풍경을 새삼 꼼꼼히 살필 수 있었지.


(중략)


난 좀 더 들떠 있어. 오늘은 몸뚱이를 기댈 땅에 왔으니까!



개와 땅


개는 몸 기댈 땅을 찾아.


묶였을 땐, 개집

하루만을 기댈 땅이야.


잠만 자니까,

질 나쁜 땅이네!


내가 가끔 찾아갈 때,

애정을 기댈 땅이야.


찰나의 행복은

얄미운 땅이네!


건조한 밥은

식욕을 채울 땅이야.


굶고는 못 살아,

애물단지 땅이네!


시골길 탈출은

몸 맡길 땅이야.


완벽한 땅이네!

부러운 땅이네!



물론 땅 얘기도, 지금은 아니야. 우린 산정에 최대한 빨리 가고 있으니까. 목적지가 확실해서 좋아. 흙으로 된 땅이 있고, 우리 말고도 많은 숨소리가 들려서 좋아. 이 정도면 산정까지의 일을 충분히 설명한 거 같아.


오늘은 깔끔한 가을의 하늘이었고, 산정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어. 바람은 산들거리고 있었지. 산정에 앉은 정자를 보자마자,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정자와 비슷한 높이가 되었을 때, 누가 거기 앉아있다는 걸 알았어. 자는 거 같았지. 산 아래 풍경이 보이는 기둥에 기대고 있어.


난 조심스레 개나리 신을 벗고, 마루 위에 올라갔지.

“뭘 그렇게 조심하고 그래?”

아, 조용히 해!

“그게, 깰까 봐…….”

“그럴 필요 없어. 쟤 자는 게 아니거든.”

?

“그놈의 잘난 명상 중이시겠지.”

“이젠 아니야.”

!!!!

“거봐.”

“슬슬 올 때라 생각했어.”


그렇게 갈색 머리의 아이와 이야기를 시작했어. 녀석은 다짜고짜 세 개의 시를 읊었지. 정말… 마음에 드는 시야……. 좋은 시란 이런 걸까? 대단한 건 몰라도, 그냥 마음이 편해져.


“난 시는, 하늘이만 쓰는지 알았어.”

“이렇게 좋은 걸 녀석만 하는 건 너무하지.”

하긴,

“확실히, 좀 너무한 녀석이긴 해.”

“하늘이가 왜?”

“굳이 대답해야 해?”

초롱인 멋쩍게 웃었어. 네 생각에도 그렇지?


사실, 요즘 좀 좋지 않아. 뭐, 피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이번엔 다른 일이 많아서 다행이야. 이 타이밍에 보리를 만난 것도 딱 좋지. 우린 좀 쉴 필요가 있어.


“아하하하. 너희 둘, 사이가 좋구나?!”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엑! 어째서?!”

이러면 따지고 드는, 평소의 초롱이라 다행이야.

“걱정하지 마. 너흰 누구보다 사이가 좋아. 난 알 수 있다고.”

언제나 이 친구는 참 편안해. 아버지가 차분할 때의 나는, 엄청나다고 했었지……. 초롱이도 그걸 느끼고 있을 거야.


“아! 소개가 늦었구나. 난 보리라고 해. 푸른이랑 같이 다니다니, 너 참 용하구나!”

아, 진짜 제발 그러지 마. 녀석이 으쓱해질 거라고…….

“그럼! 내가 평소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

저 의기양양한 눈빛을 봐……. 상대가 보리라서, 화내기도 그런데…….

“ㅎㅎ, 난 초롱이야. 푸른 들판에서 왔어.”

“너도 숨 쉬는 곳에서 왔구나. 좋네~. ^^”

또 저 사람 좋은 아빠 미소…….


“갑자기 물어보는 거지만, 여긴 온통 가을이네?”

“푸른 들판은 온통 봄이지? 여기도 편안한 곳이지만, 들판도 한번 가보고 싶어.”

“맞아! 여기도 정~~~~말 이쁘지만, 우리 들판도 엄청나다고~! ㅎㅎ!”

싫다. 의기양양 듀오…….

“이곳은 먹을 것도 맛있어. 고구마 좀 먹을래? 동치미도 있어.”

“세상에! 여기가 무릉도원?”

“아하하하!”

제발 아무나 나 좀 살려줘…….


투박한 고구마의 촉촉한 속내는, 희붉은 동치미의 담백한 국물과 어우러질 운명인 거 같아. 날 살려준 건 녀석들이지. 이것들이 없었다면, 난 아마 못 앉아 있었겠지?


“보리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뭐야? 하늘이랑 비슷한 건가?”

“시가 좋은 이유는 시이기 때문이지. 하늘이는 시를 잘 쓰지만, 특히 대단해 보이는 시를 잘 써.”

또 알아듣기 힘든 말을…….

“음? 그러니까, 네가 더 잘 쓴다는 건가?”


“아하하하, 그렇게 들릴 수 있겠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시는 하늘이가 훨씬 잘 쓰지. 다만, 하늘인 여전히 시를 특별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야.”

그렇게 얘기한다면,

“하지만, 시는 특별한 거 아니었어? 뭔가 일상적이진 않은 거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겠지?

“물론 특별한 시는 있어. 하지만 시는 특별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오늘 내가 읊은 시만 해도, 하나는 수업 시간에 딴짓하다 본 풍경이고, 하나는 가을 논의 반사광을 얘기했을 뿐이야. 마지막은 우리 집 개한테 미안한 마음이지.”


“오!!!! 오……. 근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시를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시는 우리가 흥얼거리는 노래일 수도 있고,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일 수도 있지. 알게 모르게 느껴온 죄의식일 수도 있고, 갑자기 스치는 시시한 생각일 수도 있어. 즉, 초롱이의 시는 초롱이답게 흥얼거릴 수 있는, 모든 거란 말이야!”

“아! 시는 봄이구나!”

ㅋ!

“오~. 맞아, 너한텐 그게 가장 적절할 거 같네. 맞아, 시는 봄이야.”


“근데 하늘이도 시는 특별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아, 그건 머리로 아는 걸 다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안과 선생이 안경을 쓰고, 아이스크림가게 사장이 아이스크림을 안 먹는 거랑 같은 일이야.”

“오! 뭔지 알 거 같아! 근데, 너도 은근~히 가차 없구나?”

“아하하! 난 사실을 말할 뿐이라고! 우린 커피를 싫어하는 바리스타 같은 거니까.”

“으아~~~~,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 거야~! ㅋㅋㅋㅋ”


둘은 죽이 척척 맞아. 둘 다 흙을 사랑하니까.

“여기 오니까, 평소보다 기운이 나는 거 같아! 사실 어제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보리가 내게 도끼눈으로 경고했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 난 녀석이 제일 무서워……. 누구보다 친절하고 편안하지만,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 한 명씩은 있지 않아?

“그거 정말 다행이야. 여기도 흙이 있고,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맞아! 바로 그런 느낌이야! 뭔가 고요하게 시끄러운, 숲의 소리가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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