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95번인, <‘나’ LV2>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야.
2단계까지의 나를 정하고 가장 좋았던 점은, 내 목표로 나아가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거야. 내 타고난 성격에 비해, 내 꿈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었지. 난 책을 쓸 거야. 나만의 자유를 얻을 거야. 누군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갈 거야.
‘공부’를 핑계 삼을 수 있는 시기까지, 꽤나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지. 하지만 점점, 가장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어.
사람들이 나한테 굳이, 나중에 뭐 할 것이냐 물어보는, 진정한 이유 말이야.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펑펑 놀아 재끼면, 나중에 입에 풀칠이나 할 줄 알아?’
더 깊은 속마음을 써보자면,
‘난 이렇게 고생하며, 하기 싫은 거나 붙잡고 있는데, 넌 뭐 특별한 놈인 줄 알아? 곧 그 콧대가 꺾일 날이 올 거다, 등신.’
나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비합리적인 낙관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 난 이러다 보면 언젠가, 내 꿈이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접점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결국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어. 정확하게는, 내가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놈이 절대 아니란 걸 알아버린 거지.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나태한 놈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거지.
결국 아무런 대비 없이, 그 순간이 오고 말았어. 난 많이 절망했지. 내가 당당하게 여기던 가치가, 세상 속에 한 줌의 가치도 가지지 않는, 헛것인 거 같았어. 하지만 여전히, 어떤 대가도 치르려 하지 않았지. 계속 내가 틀렸을 리가 없다고 여기니, 현실에 무릎 꿇을 이유가 없다는 식의 객기를 부리고 있었어. 지금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고.
어쩌면 LV3의 단계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합리화에 지날지도 몰라. 하지만 이 단계는 분명, 내 사회적 성장에 도움이 된 개념이야. 이제 그 단계의 나를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해.
난, LV2에 심취해 있었단 걸 인정해야 했어. 대학에서 원하는 지식을 많이 얻은 게 사실이지만, 그 지식이 내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지.(물론 이건, 내 지식이 아예 허황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야.)
난, 내가 할 수 있는 밥벌이를 고민했지. 가장 먼저, 연구자의 길을 생각했어.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세웠던, 막연한 목표였지. 내 열정으로 그 길에서의 입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내 길일 수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영리한 인간이 탐구하는 모순과는 거리가 멀더라고. 표현상으로 비슷할 순 있지만, 내가 원하는 탐구는 훨씬 감정적이고, 실체를 가지지 않는 무언가거든.
한 마디로 난, 내 고집을 꺾고, 누군가의 입맛과 기준에 맞는 텍스트나 성과를 낳기 싫었던 거야. 내가 목격한 대학원생의 모습이란, 또 다른 형태의 고등학생 생활을, 자존심도 버리고 감내하는 세계였어. 심지어 내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자본(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후원이라는 불확실한 수단을 물색해야 하지)이 필요했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공부가 설 자리는 없었어. 적어도 10년 동안, 없어야 했어.
내가 선택한 해법은, 내 사상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야. 대학에서 내 생활의 힌트를 얻을 수 없다면, 적어도 누구의 도움 없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쉽게 말해, LV2의 환상을 최대한 없애고, 진정한 의미로 완성하는 게 먼저라고 말이야.
난 이 원칙에 맞게 행동했어. 내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대학을 떠났고, 새롭게 알게 된 현실적인 지식을 통해, 자유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
이제 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나(LV3)를 완성해야 했어.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참 운이 좋다는 것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자원과 기회를 날리며 살아왔다는 것도 깨달았지. 간단히 얘기해서, 난 생각보다 더 능력 없는 녀석이었어.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의 절대치뿐만 아니라, 하루라는 시간에 배분할 수 있는 정신 에너지의 양도 터무니없이 빈약한 녀석이었지.
난 멘탈이 너무 약하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녀석이더라. 하루 9시간 일을 하고 오면, 꼴에 삶의 목표라고 했던 글쓰기는 고사하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하는 게임도 벅차다고 느끼는 거야.
이 시기에 내가 느낀 절망은, 정말 짜증 나는 것이었어. 당시의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에 절망하며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아주 오래전엔, ‘우주 속에 나’라는, 존재의 무의미함에 절망했지. 곧, 남들보다 뛰어난 나를 포기하기도 했어. 내가 대부분의 타인에게 거대한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도 실감했고, 행복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지. 결국 내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도,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경지란, 어떤 인정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냈지. 얼마나 훌륭한 헛소리를 만들어내든, ‘자기만족’의 굴레에 빠져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여기까지의 난, 괜찮았어. 어떻게는, 내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시기에 내가 느낀 절망은, 전혀 궤를 달리하는 거였어. 난 결국, 자기만족도 못하고 살아가는, 똥덩어리였던 거야. 내 몸뚱이라는, 조그마한 물체를 현실이라는 계산에 대입해 보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방정식이란 걸, 알아버린 거지.
쉽게 얘기하면, 내가 좋아해서 유지하는 것과, 삶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녀석이란 걸 알게 되었어.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냥 일하면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내게 이건, 육체라는 것을 원망할 정도의 일이었거든. 난 내 생각보다, 더 뻔뻔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 한 거더라고.
당시의 난, 일이 끝나고 9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을 필요로 한 거 같아. 적어도 9시간을 일했으면, 9시간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식이지. 벌써부터 LV3의 공식이 깨지고 있는 거야. 18시간을 일하거나 쉬는 시간에 쓰면서, 하루에 8시간은 자야겠다는 심보는 뭐지?
결국 LV2에서 만들어진 모순을 수정할 수 있는, 다른 단계의 ‘자유’가 필요했어. 이미 ‘자유’에선 벗어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이지. 세상의 잔혹함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자유를 쟁취하는 생존법을 각오하는 거야.
거창하게 말이 많았지만, 스스로 어떤 것에 ‘선택과 집중’ 전략을 사용해, 생활을 유지할지 결심했다는 말이야. 그것을 위해선,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해. 하나는,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켜나갈 수 있는 노동과 자유를 융합시킬 것. 다른 하나는, 원하는 자유 중 폐기할 수 있는 것을 확실하게 잘라낼 것.
두 단계 모두,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각오를 다지게 했어. 어떤 기술이나 전문성이 없는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숭고한 노동과 생존 속에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것. 자신이 바라는 세계에 기대고 싶다면, 누군가가 누리는 안락함까지 바라지 말 것. 최소한 스스로를 세상의 잔혹함에서 지켜낼 수 있을 때, 당당하게 내 꿈에 대해서 설파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것.
그래서 난 여전히, 견실한 인생의 도망자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어. 아무리 스스로를 비참하게 느끼고 있더라도, 그 시간대의 자신은 그 선택을 해야만 했다고 말이야. 그것이 내가, 가장 빠르게 자신을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지금, 그냥 몸을 움직일 뿐인, 단순한 노동으로 이어가는 생계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 지금의 난, 이 정도가 딱이야. 다음 단계엔 어떤 변화가 기다릴지 모를 일이지만, 난 이 시점에서, 이 정도의 삶을 내 의지로 선택한 거야.
내 넘쳐나는 흥미에, 휩쓸리며 살지 않는 것도 중요했지. 이게 오히려 더욱,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 대부분은, 흥미가 생기는 분야를 포기하는 형태로 이뤄졌지. 음악, 그림, 문학처럼, 애매하게 예술을 동경하는 나를 내려놓는 작업도 있었어. 좋아하는 게임을 확실하게 추리는 작업도 포함되지. 이성과 생식활동에 대한 흥미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했어. 꽤나 금욕적인 작업이었지만, 지금의 내 역량을 생각하면, 이렇게 결정하는 게 맞아. 조금의 능력도 없는데 허황된 꿈을 설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충분히 이해할 만큼 징징거렸으니까.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최소한의 노동, 착실하고 끊임없이 사소한 공부(책, 유튜브, 영화 등 간접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 단순하지만 계속 정진할 수 있는 2개의 게임, 가족과 친구 몇 명과의 소중한 관계, 찬찬히 공상에 빠지는 시간, 이 모든 것에서 얻는 영감을 해소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글쓰기. 이 정도가 인생에서 온전히 가져갈 수 있는, ‘전부’라는 결론을 내렸어. 그것이 세상 속에 실제로 내 세상을 실현할 방법론인, LV3인 거야. 여기까지 30년이 걸렸어. 난 정말 정말 느려터진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