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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좋으라고 살인을 – 소설 상상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어. 내가 죽어버리거나, 다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물론 한순간의 충동적인 생각이고,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왜 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주로 감정이 폭발할 위험이 있는 상황인 거 같아. 폭발하기 직전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원시적인 방법 말이야. 정말로 폭발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상황을 벗어난 자신을 상상하는 거지.


그래도 죽음은 무시무시한 경계야. 함부로 죽음을 경외하거나 바라는 건 너무나 위험하지. 가장 확실한 도피 방법으로 죽음이나 살인을 선택하는 건, 교환비가 이상하다고 봐. 더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죽음이나 살인이 필요했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사실이야. 지금도 진행 중인 거고.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해 엄격해지는 건 좋은 현상이야. 난 한때 내 염세주의에 심취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어. 내 안의 휴머니즘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선 안 된다고 말해줬기 때문이지. 죽음에 대한 경외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도 내겐 중요한 직관이지만,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생각인지 금세 알 수 있었던 건 교육 덕분이야. 학교, 만화, 게임, 책, 부모님 등 모두가 생명은 소중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난 극단적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어.


하지만 난 또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버렸지. 극단적인 선택을 제외하고, 죽음을 분석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죽음이 전적으로 금단의 영역일 수는 없을 거야. 모두가 죽을 운명이면, 죽음에 대한 나의 심리는 분명 의미가 있을 거 같아.


그런 직감으로 상상해 본 상황이 있어. ‘누구 좋으라고 살인을’이라고 이름 붙인 이야기였지. 말 그대로, 살인이 누구에게 득이 되는 행동인지 따져보는 시도였어. 결국 이야기로 만들 수 없을 만큼 황당한 상상으로 끝나버렸지만, 이렇게 언급할 수 있을 정도의 헛소리는 되어서 다행이야.


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두 가지야. 죽음을 합리적으로 경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직관과 그 사람을 암살해야 하는 사람의 의구심. 암살자는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는 폭력에 매료된 사람이었어.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한 마음이 들 정도였지.


하지만 이번 타깃은 전혀 깔끔한 녀석이 아니야. 목에 총구가 들어와도 딱히 비참해지지 않았지. 녀석은 마지막 소원으로 자신과 대화하길 원했어. 그럴 여유나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도 했지. 암살자는 처음부터 전혀 깔끔하지 않은 상황에 짜증이 치밀고 있었어. 이대로 끝내면, 가장 입맛이 더러운 의뢰가 될 게 뻔했지. 소중한 것을 훔치는 쾌감은 전혀 그런 게 아닐 거야.


둘은 대화와 암살에 걸맞은 장소에 철저하게 도착했지. 녀석은 자신이 죽음을 동경하는 방식을 설명했어. 즉, 내가 죽음을 동경하는 방식이지. 죽음은 당연히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삶이 그러한 만큼 소중한 개념이야.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죽음의 진정한 두려움과 필연성을 인정하는 과정이지.


동시에 삶은 계속되는 고통이기도 해. 삶을 포기할 정도의 것은 아니지만,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지. 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을 정도의 겁쟁이지만, 그것이 찾아오면 어느 정도 기쁘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해. 남들에 비하면 미약하고 비겁한 노력이라도, 내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거야. 남들에 비해 쉽게 죽음이라는 어리광을 품고 싶어 하는 자신을 어떻게든 이어나가고 싶어.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지만, 이 정도가 내 삶과 죽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있거든.


그런 최선을 다한다면, 아무리 비참하고 오만한 나도, 스스로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상태를 유지하다 죽음이 찾아오면, 어느 정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야. 삶에는 스스로 파멸을 향하는 힘이 조금씩 작용하기 마련이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최선을 다해 왔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와도, 후회 없이 어느 정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이쯤에서 살인이라는 행위의 비합리성을 생각할 수 있었어. 누구 좋으라고 살인이 행해지는 걸까? 예전엔 아이나 젊은 여인의 목숨을 바쳐서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다고 믿었다는데, 지금까지 그런 믿음이 이어져 오는 걸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이 개인의 이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봐.(심지어 그것이 비정한 힘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희생이라도 말이야.) 아무리 나처럼 죽음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도, 죽는 입장은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는 거야. 죽음보단 삶이 훨씬 가치 있는 거고, 아무리 스스로 반대로 생각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확신하니까.


살인자는 어떨까? 누군가는 살인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데, 그게 정말로 이득의 모습인 걸까?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는 경우도 허다하니, ‘살인’이라는 행위에 충분한 합리성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 도덕성 탓에,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리고 싶어. 설령 살인을 즐기고 영화를 누리더라도, 살인자의 삶은 이어지는 거야. 사회적이든 심리적이든 자신의 고통을 가중하는 행위가 될 거라는 거지. 난 살인자가 나타나면 날 죽여도 상관은 없다고 하겠지만, 할 수 있는 저항을 할 거야. 내가 죽어도, 그런 저항은 이어지지. 그 사람의 죄를 밝혀내려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내 죽음에 증오를 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살인의 무게도 있겠지. 그 모든 걸 감수할 만큼 살인이 가치 있는 일인 걸까?


물론 거만하고 모욕적인 말이야.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만한 헛소리가 없을지도 모르지. 피해자든 가해자든 분명 그렇게 느낄 거야. 나도 이런 생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난 이 소설을 구체적으로 구상할 정도의 인간이 아니더라고. 내가 내린 결말은 이 정도야. 살인자가 처음으로 살인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순간, 당신이 삶에 기울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진다고 말이야. 당신 하나 좋으라고 살인을 할 수 없다고 말이야. 남은 인생은 부디 제정신으로 살아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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