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가을 하늘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도록 무겁게 축 쳐진 오늘 같은 날. 일어나는 것도, 점심을 먹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사업을 시작하고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다거나 독한 여자가 못된다는 점이다. 열심히 해야 할 때는 - 그래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널부러져 버린다. 오전 내내 제안서를 마치고, 발송, 을 누르고 나니 전원이 꺼진 핸드폰처럼 머리가 띵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핑계로 누워버렸다. 딱 10분만 하던 것이 30분이 되고 1시간이나 지나고 나니 지금은 오후 3시.
나무늘보처럼 기지개를 켜고 냉장고를 뒤적인다. 뭔가들이 있긴 한데 당기는 것은 없다. 냉수 한 컵을 들이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자아자, 이제 다시 일을 해보자.
보내야 하는 메일과 완성해야 하는 문서들을 후다닥 쳐내고.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수익이라는 놈을 좇아 마우스를 이리저리로 옮긴다. 카드값은 둘 재치고 월급을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똥이고 된장이고 가릴 것이 없어진다. 갑자기 방금 전의 나태함에 분노가 치솟았다. 하, 감정조절은 왜 이렇게 항상 어려운지.
"안녕하세요 - 어제 연락드린 사람입니다."
뜨아, 벌써 일곱 시다.
이 갑작스러운 미팅은 뜬금없는 인연으로 시작됐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이 어제 오후 4시쯤. 서울의 한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단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새로운 이벤트를 제안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전에 미팅을 한 번 했었다는데,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일단 '전통시장'이라는 단어가 머리채를 잡았다. 그곳의 생리는 잘 알다 못해 뼈에 새겼으니까.
나는 간단히 나의 프로필을 설명했다. 월 검색량 90건이던 시장의 이름이 26배 성장했고, 일 방문자 20명 미만이던 곳의 주말 방문자가 800~1천 명가량이 되었던 작년 가을에 대해. 단장님은 내 소개가 퍽 마음에 드셨던지 바로 다음날인 오늘, 사무실까지 찾아주신 것이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미술 학원인가 봐요, 작업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이것저것 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우리는 어른들의 대화법으로 들어선다. 무엇이 필요한 지,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그 대가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선 130페이지에 육박하는 그 날의 제안서를 보여드렸다. 내가 꼭 실현하고 싶었던,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에 그치고 만 그림들을. 미팅을 준비하면서 작년 가을을 돌이켜보니 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했다. 돈도, 인정도, 시간도 없었는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끌고 갔던 걸까, 신기할 뿐이다.
"음.. 저희 시장에도 이런 걸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딱 필요한 내용입니다."
200여 개의 점포와 시장을 대표하는 그분은 내 고생의 흔적이 인상 깊은 듯하다. 내년 예산액까지 이야기하면서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나는 떨떠름하게 배웅했다. 도장을 찍기 전까지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장을 찍어도 수틀리면 엎어지는 것이 계약 아니던가.
하지만, 그래도.
1년이 지난 지금,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고생이 개고생이 아니었다고 인정해주어서 기쁘다.
그 미팅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한낮의 게으름에 사로잡혀 자괴감을 무겁게 안고 귀가했을 터다.
열심이었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잘 준비를 마치고 하얀 침대보에 무거운 다리를 쭈우욱 뻗고 누웠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도 또 잠이 온다. 이렇게 게을러터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자책이 솟을락 말락 할 때 울리는 전화벨.
"뭐 하니"
다짜고짜,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남동생처럼 묻는다.
"자려고 누웠어"
"오늘은 어땠니"
"아주 신기한 일이 있었어."
아저씨와의 대담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조금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은은한 무드등이 내려앉은 하얀 이불을 뒤척이면서.
"오, 잘 됐네.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아직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네가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렇게 연결도 되고 하는 거지."
"김칫국 안 마실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내일도 열심히 살아라."
아직도 해병대 장교인 줄 아는지 그의 말투는 늘 다나까스럽다. 덩달아 나도 각 잡힌 대답을 하게 된다.
"알았습니다. 이제 자라"
안녕. 안녕.
전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을 본다.
오늘 하루는 또 어땠지. 쳐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 언젠가 돌아보면 또 튼실한 씨앗이 될지 모를 일이다. 성취가 꼭 성공은 아니고 탈락이 꼭 실패도 아닌 것이니. 꾸준함과 끈기, 삶을 길고 넓게 보는 여유, 급할수록 주변을 살피고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인간미-라는 것이 오늘 나에게는 충분했나.
조금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불을 끌어당긴다.
내일부터는 경험의 시차를 기억해야지.
늦잠도 좀 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