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의 내가 믿은 행복은 그 애의 여자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교문을 서성이는 위태로운 저 아이를 잡아두는 유일한 여자애가 된다면,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바람대로 그 아이와 손을 잡고 운동장을 걷게 되었을 때 세상을 가진양 기뻤다. 엄마의 한숨도, 선생님의 질책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연애가 끝났을 때, 내가 그토록 방황했던 이유는 기쁨의 다른 이름을 찾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 나에게 전화를 거는 것,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손을 내밀어 주는 것 말고, 다른 기쁨을.
내 행복의 기준은 저 아이의 손에 있는데 어디서 무엇을 찾으라는 것인지. 괴로웠다.
이별의 상처를 덮기 위해 겨우 발견한 유토피아는 대학생활이었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명문대학생이 되면, 이제 더 이상 슬프거나 힘들지 않겠지. 그 희망이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저 캠퍼스 안에만 들어가면 나는 반드시 행복할거라는 주문.
1학년 때는 그 말이 맞았다. 2학년 때는 그만큼은 아니었다. 3학년이 되고 4학년이 되어서는 20대의 절반을 행복하게 해 주었던 학생증을 내놓아야 한다는 현실에 또다시 좌절했다. 마음 놓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또 잘못 설정했다.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 이를 갈며 골똘히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불안에 몸서리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잠깐 행복했다가 이내 사그라드는 기준 말고,
영원히 나에게 행복을 약속할 대상이 필요했다.
엄마와 교수님은 취직을 하라고 했다. 친구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나는 결정이 두려웠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 위에 섰다. 4대 보험이 되는 안정적인 직장인. 전국에 지점이 있고 신문에 이름이 나오는 회사. 전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게 월급을 받고,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가니까 나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도, 급기야 사무실 키보드 앞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는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멈춰야 할 지도 알 수 없어서 생각을 멈췄다. 그냥 살았다. 코가 있으니까 숨을 쉬었고 눈이 있으니까 앞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 아는 척, 이해한 척, 감사한 척하면서 2년 반을 살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건강검진 설문지는 나를 들쑤셨다.
사실대로 체크를 했더니
예상대로 검진을 진행한 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우울증 증상이 있으니 상담 예약을 해주겠다고. 회사 돈으로 무료 상담도 받을 기회인데 고민 없이 저는 괜찮아요 라고 거절했던 이유는, 열다섯에 행복의 기준으로 믿었던 그 아이가 떠났을 때 4년 동안 들락거린 정신과 상담으로 아무것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복의 마침표라 믿었던 사원증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을 때.
'이래서 제가 힘든 거예요' 라는 하소연이 무엇을 고칠 수 있을까.
1년을 더 고민하고 사원증을 벗어놓았다. 더 늦기 전에 평생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나를 내몰았다. 지금까지 하나의 행복을 전부라고 믿었더니 몽땅 실패했겠다. 그렇다면 여러 개를 쫓아보자. 나에게는 열 개의 행복 리스트가 있었다. 여기에 몽땅 체크를 하면 무조건 행복해지리라고 확신했다.
첫 1년에 5개에 체크를 했고 다음 1년에 2개에 더 체크 표시를 했지만, 그 과정은 아름답지도 흐뭇하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는 꿈에 나오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날 만큼 끔찍했다.
서른이 된 나는 '이렇게 되면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2년 동안 7번을 반복했더니 믿을 힘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된 상황'에 내가 만족하리라는 보장이 없더라. 무엇을 가정해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쇼핑몰 주문이 하루에 10개씩 들어오면. 천명도 넘는 사람이 참여하는 행사를 기획하면. 2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면. 내가 이름 붙인 가게가 생기면. 이러하면, 또 저러하면.
행복하겠지. 그러니까 지금의 고통쯤은 견뎌야 해.
이 사고방식이 매우 어리석고, 잘못되었다. 차라리, 스물넷에 멋도 모르고 좋아했던 문장을 좌우명 삼는 게 낫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어."
그때는 저 말을 내 맘대로 오역해서 매일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이 남자 저 남자랑 놀아나도 괜찮다는 뜻으로 썼지만. 극단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여전히 옳다.
바쁘게 하루를 여느라 신록이 무성 해지는 것도 감상하지 못한다면 미라클 모닝이 무슨 소용이며, 경제적 자유를 위해 공부를 하고 투잡 쓰리잡을 하느라 가족의 고민을 내버려 둔다면 훗날 누구와 그 기쁨을 누릴 것인가.
이제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 주어진 행복을 발견하며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