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몸과 마음이 제 컨디션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후부터 다시 문득, 휘몰아치는 감정들이 한껏 뒤섞여 잔잔한 두통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눈치챈 걸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찌나 귀신같은지 한 동안 보지 않던 타로카드 영상들을 나에게 띄워주고 나는 또 그 영상을 클릭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속마음,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무의미한 영상을 보고 있는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렇게 누워서 영상만 보며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주말은 아이와 함께하는 주말이라 집 근처 과학관에 가서 태양열 비행기 만들기 체험 예약을 하고, 아이가 마음껏 시설을 구경하고 체험할 동안 나는 과학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 내 시선이 책 한 권에 꽂혔다.
감성적인 표지와 제목에 끌려 읽게된 책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왠지 제목부터 몽글몽글한 감성이 느껴지는 책을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고향의 시골 기와집에 책방을 오픈한 소탈한 남자 주인공이 학창 시절부터 짝사랑하던 여자를 우연히 다시 고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여주인공의 아픔을 담담히 위로해 주고 기다려주며 묵묵히, 하지만 우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남주인공과, 서툴지만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인정하며 사랑을 찾아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지난날 나를 참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너무 오래 지나서 잊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책이란 참 신기하게도 해묵은 기억을 다시 소환해 준다.
지금은 인연이 다해 지나간 사람이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 반짝이는 날들이었지, 하는 추억에 젖었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선물해 주고, 나를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보아주고, 나를 과분하게 예쁘다고 칭찬해 주며 사랑을 주던 사람과, 하루하루 행복하고 설레어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볼이 뜨거워질 정도로 서너 시간씩 전화통화를 하던 나의 예전 몽글몽글했던 연애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불안한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이 함께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음에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풋풋한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참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 그런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듬뿍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준 기억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기억이 훼손되거나 오염되지 않고 그저 예쁘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직장에서 후배와 예전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전에 연애했던 기억들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의 추억은 아름답게 남아있으니까. 비록 헤어졌어도, 그 사람은 나를 성장하게 한 고마운 개새끼인 거죠."
라는 말을 했었다.
사실 '고마운 개새끼'라는 단어는 내가 1년 반의 제대로 된 첫 연애 후, 힘들어하며 몸무게가 5킬로나 빠졌을 때 동생이 나를 위로해 주며 해준 말이다. 언니를 상처 준 그 사람을 빨리 잊고, 더 성장해서 좋은 새 사람을 만나 잘 살면 된다고, 연애 경험이 많은 성숙한 동생은 나를 다독였다.
그러자 후배는,
"저는 헤어진 사람들을 나쁘게 말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진심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하고 이야기했다.
"음.. 나는 너무 잘 지내지도, 너무 못 지내지도 않고 그냥 딱 평범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내가 신경 쓰이지 않게."
내가 말했다.
사실 나는 헤어진 이후에는 상황에 대한 인정과 그 사람에 대한 마음 정리가 빠른 편이라 상대방이 어떻게 지내든 크게 관심이 가지도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관계가 끝나고 허무하고 공허해진 내 마음이 슬퍼서 혼자 그 마음을 다독이느라 힘들 뿐이지 다시 관계를 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헤어진 뒤에 다시 재회를 하거나 그 사람에게 "자..?" 하는 등의 미련 섞인 연락을 하거나 전 연인에게 여지를 준 적이 없다. 그게 깔끔하고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보면 냉정해 보이지만 이성적이고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만남과 헤어짐, 기다림을 반복하고 두 달간 자신만의 동굴에 들어가 혼자 아픔을 보듬으며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재회하는 주인공 커플을 보면서 인연이 그렇게 무 자르듯 한 번에 끊기는 것도 아니며, 서로에 대한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면 다시 이어질 수도 있는 게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