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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햇살 Jun 19. 2024

기분이 태도가 되어버린 날의 자책

나의 상황과 기분이 아이에게 파도처럼 밀려가게 하지 말자.

 어제는 유난히 피곤하고 힘든 날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사람들과 일이 많아서 진이 빠지는 날이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일을 보고 내 의자에 앉으니 한숨이 절로 후- 하고 나오면서 눈 밑 가죽이 아래로 축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날.


 집에 돌아와서 간단히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를 틀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더 어지럽게 하는 뉴스를 물끄러미 보면서 멍 때리고 있는데 아이가 들어왔다. 학원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하며 30분을 놀다가 땀에 가득 젖은 머리로 들어오며 가방을 벗는다.


 "재밌게 놀았니? 얼른 씻고 밥 먹어."


 "지금 너무 배고프니까 손만 씻고 먹을게. 자기 전에 어차피 샤워할 거니까 헤헤"


 아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저녁을 먹고 같이 TV를 보다가 문득, 아이 알림장에서 본 숙제가 생각났다.


 "맞다, 너 오늘 숙제 있지 않았어?"


 그러자 아이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숙제를 시작한다. 나는 지친 심신을 달랠 겸 거실 TV로 유튜브를 연결해서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음악들을 차례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숙제를 시작한 아이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엄마, 역암이 울퉁불퉁한 돌이지?"

 "엄마, 사암은 거칠거칠한 거지?"

 "엄마, 사암이 모래로 만들어진 거 맞나?"


 과학 숙제를 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나에게 확인을 받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까지 친절하게 대답해 주다가 결국 잔소리가 철컥, 장전되더니 마치 람보가 총을 쏘듯 우다다다 발사된다.


 "너 학교에서 안 배웠어? 그거 교과서에 다 나오는 건데 왜 엄마한테 계속 물어봐? 선생님이 다 가르쳐 주신 거 복습하는 숙제 아니야? 수업에 집중을 해야지!"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교과서와 문제집을 뒤적이며 공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제는 정말 날을 잡은 건지,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기 힘든 날이었는데 아이의 숙제가 너무 많아 질문 공세는 계속되었다. 과학 숙제에 이어 환경 연계 수업에 대한 숙제가 또 있었는데, '종이, 종이팩, 플라스틱, 비닐 등 8개 항목에 해당하는 품목에 대한 분리수거 방법을 쓰는 것'이었다.


 어른인 나에게는 분리수거가 일상적인 일이고 8개 품목에 대한 분리수거 방법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아이에게는 무척 어려운 숙제인 듯했다. 아이는 30분이 넘게 고민하면서 고작 세 줄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나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엄마, 영수증은 코팅이 되어있어서 종이류로 버리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그 내용을 써도 될까?"

 "엄마, 우유갑은 종이팩에 버리는 거지?"

 "엄마, 플라스틱 분리수거는 뭐라고 쓰면 될까?"


 아이가 세 번째 질문을 하는 순간, 나는 폭발했다.

 입에서 불을 뿜는 공룡처럼 부왁, 하고 분노가 언어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아니, 너는 어떻게 매번 숙제를 엄마한테 다 물어보니? 네가 평소에 책을 안 읽으니까 글을 쓰는 방법을 몰라서 매번 글 쓸 때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거야! 엄마가 숙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불러줘야 되니? 너 바보야? 어?"


 아뿔싸.. '바보'란 말까지 나와버렸다.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와다다다 잔소리를 쏟아붓고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제 엄마는 안 도와줄 거니까 너 스스로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주제에 맞는 내용 요약해서 작성해. 스스로 하는 방법도 배워야지. 이렇게 숙제할 때마다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 싸우면 우리 사이까지 나빠질 것 같아. 엄마도 네가 어떻게 했는지 안 볼 테니까 그냥 잘하든 못하든, 너 할 수 있는 만큼만 해가고 못한 거는 선생님한테 피드백을 받도록 해. 너무 완벽하게 해가려고 하지 마."


 그리고 훌쩍이며 "알았어.." 하고 말하는 아이를 뒤로 한 채 안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내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해 버렸구나. 참, 나는 엄마로서 아직 한참 수양이 부족하다.'

 오른손을 이마 위에 얹고 후폭풍처럼 몰려오는 후회와 반성을 마주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야, 너는 밖에서 남들한테는 싫은 소리도 안 하고 피곤할 정도로 친절을 베풀면서 집에서는 왜 이렇고 있니. 못났다 진짜.. '


 마음속에서 스스로와 대화하며 이성을 찾는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끼익-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들어온다. 내가 몸을 세워 침대에 걸터앉자 아이는 나에게 와서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아이가 나보다 낫다.


 "엄마가 너무 화를 내서 미안해. 엄마가 일하고 와서 너무 피곤했는데 네가 계속 숙제를 물어보니까 엄마가 갑자기 화가 났어.   바보라고 한 것도 미안해. 근데 엄마는 사실 네가 엄청 똑똑하고 열심히 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냥 엄마가 감정이 너무 폭발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미안해."


 눈물 한줄기를 주륵 떨구며 아이가 대답한다.

 "응. 나도 미안해. 계속 물어보고 책도 안 읽어서.."


 아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미안하고, 고맙고, 아프다.

 조용히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두 팔로 아이를 꼭 안고 나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훗날, 아이에게 사춘기가 와도 우리가 이렇게 대화하며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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