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선배 언니와 동학년 후배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번 주는 격주마다 돌아오는, 아들이 할머니집에서 주말을 보내는 주라서 나 혼자 오롯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단단하고 통찰력 있는 언니를 만나면 나의 시간을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이지만 나와 비슷한 예민도와 섬세함을 가진 후배 선생님도 이 언니와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어서 셋이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식사는 유명인이 다녀갔다는 쭈꾸미 맛집에서 하기로 했다. 오후에 청주에서 친구 결혼식에 참여하고 온 나와, 서울에 계신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온 후배, 그리고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자유부인이 된 언니. 우리는 만나자마자 그간의 근황들을 쏟아내듯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만나자고 이야기했으니 밥은 내가 사겠다며, 저녁식사값을 결제했고 우리는 후식으로 제공되는 추억의 삼색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경관이 아름답다는 것이며, 요즘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가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하자, 언니가 근처에 노을 맛집으로 유명한 장소가 있다고 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어딘지 검색해 보니 그곳은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에도 나왔던 유명한 곳이었다.
다음에 아들이랑 같이 가봐야겠다고 하자 언니는
"아들은 안 좋아할걸? 여기는 그냥 경치 감상만 하고 와야 되는 곳이라. 우리 지금 같이 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섬세한 후배는 핸드폰으로 일몰 시간을 검색하더니
"지금 6시 반인데 일몰시간이 6시 50분이네요. 얼른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겠는데요?"
라고 했다.
나 혼자였으면 엄두도 안 내고 다음으로 미뤘을 텐데 두 사람이 척척, 계획을 세워준 덕분에 얼떨결에 멋진 경치를 구경하러 가게 되었다.
"셋 다 차 가져가면 주차하기 힘드니까 T가 운전하는 차 타고 가자~!"
언니는 자연스럽게 후배의 차에 타자고 했고, 고맙게도 후배도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우리는 후배의 차에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갔다.
와.. 언니가 추천해 준 장소의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일몰은 이미 진행된 후였지만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하늘빛에 물든 강줄기까지.. 그 순간밖에 볼 수 없는, 찰나의 자연이 선물해 주는 감격스러운 풍경이었다.
"언니, 여기 추천해 줘서 너무 고마워. T샘도 운전해 줘서 고마워요. 여기 정말 너무 아름답다!"
경치를 감상하느라 산모기에 다리를 3방이나 뜯겼으나 그것을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풍광이었다.
우리는 다시 T의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한적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언니가 사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 나는 호주에 다녀온 후로 요즘 너무 불안하고 생각이 많아요. 사람들 눈치도 더 살피게 되고.. 혹시나 나의 말과 행동 때문에 타인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에 더 조심하게 돼요. 하나의 상황에 대해서 내가 어떠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 발생하게 될 수십 가지의 결과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하고 싶은 행동도 더 억제하게 돼요. 제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무슨 일을 하든 Love myself가 되어야 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생각 때문에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 그건 너무 괴롭거든. 될 대로 돼라! 정신이 필요해. 너는 남을 너무 생각하려고 해서 그래. 우선 너를 생각해. 그리고 그냥 흘러가는 상황을 즐기면서 그때 그때 너의 마음에 따라 판단하면 돼."
가만히 듣고 있던 후배도 말했다.
"제가 부장님을 처음 봤을 때, 부장님은 너무 밝고, 에너지 넘치고, 농담도 잘하셔서 다른 사람들은 부장님을 그런 사람으로만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계속 보다 보니 부장님은 엄청 조심스럽고 생각도 많으시고 소녀스러운 분이시더라고요. 부장님이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더 그렇게 행동하시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답했다.
"맞아요, 샘. 나는 내가 여리고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더 밝고 과장되게 방어기제를 치고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나를 그런 사람으로만 보기도 하고요. 선생님처럼 나랑 예민도가 비슷한 사람들만 진짜 저를 볼 수 있는 거죠."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누군가 그랬어. 너무 애쓰면서 살지 말라고. 내가 보기에 너는 너무 애쓰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내려놔도 괜찮아. 사실 나도 매 순간 엄청 struggle 하면서(애쓰면서) 살고 있지만 조금 내려놓고 살 필요가 있어. 그래야 편해져. 그리고 일상에 루틴을 갖는 것도 좋아. 생각이 많아지면 일단 나가서 걸어. 운동이 도움이 많이 돼."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이어진 대화를 통해 나는 몸과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떠서 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드라이브스루가 있는 스타벅스 매장에 왔다.
읽고 싶은 책들을 꺼내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용히 앉아 어제의 대화를 상기시켜 보니 다시금 마음이 참 감사해졌다.
나를 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 언니, 먼 길을 운전해 주고 나를 걱정해 준 후배에게 다음에 만나면 다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