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난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해군도 아니었고,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공군도 아니었다. 육군은 이런저런 섬뜩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냥 싫었다. 아 쉬운 게 하나도 없네. 트라우마 인가? 고소 공포증인가? 남들은 여러 선택지 중에서 더 좋은 것을 택하던데, 난 반대다. 어느 쪽이 최선인지가 아닌 어느 쪽이 최악이 아닌지를 골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그렇게 끝나지 않는 고민의 시간들을 보내며 결국
그다음 해 5월 1일, 날씨 좋고, 푸르고, 화장한 날, 그나마 물에 대한 트라우마 보단 조금은 덜 무서운 선택이라고 판단한 고소공포증이 기다리고 있는 공군에 자원하여 시험을 보고 입대를 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공군이라고 다 비행기를 타는 건 아니더라. 더 사실대로 말하면 사병이 비행기를 탈 일이 없었다. 난 다행히 방포대로 가서 30개월 동안 비행기 구경도 못해 봤다. 그래서 공군의 트레이트 마크인 활주로에서 족구도 못해 봤다.
특기는 운이 좋게 총무병으로, 장병들의 휴가와 외박, 군대행사등을 담당했고, 또 운이 좋아서 전령병이 되어 모든 장병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일주일에 2번씩 외출을 했다. 전령을 나가는 날이면 아침도 먹지 않고, 바로 일급 기밀 서류들을 챙기어, 좌석 버스를 타고, 집에 들러서 어머님께서 풍성하게 잘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시흥에 있는 여단 본부에 갔다. 가져온 일급 서류들을 전달하고, 또 부대로 가져갈 기밀 서류들을 챙기면 오전의 업무는 끝이 났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가장 중요한 첩보작전의 임무가 시작이 된다. 나를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들켜서도 안된다. 주위를 살핀다. 또 살핀다. 한번 더 살핀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과거 100m를 13초에 주파한 실력으로 전력질주를 한다. 온 힘을 다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비디오 방이었다.
“어 왔어? 오늘은 뭐 볼래?” 부모님보다 나를 더 반기시는 비디오방 아저씨다. 알면서 뭘 물어. 군인이 보는 게 뭐 뻔하지. 그렇게 2편의 영화를 보고, 때로는 비싼 돈을 내고 잠을 자기도 했고, 가끔 아주 가끔은 비디오 방 사장님과 나의 은밀한 거래도 이루어졌다. 비디오방에서 보관하던 나의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가기도 했다. 걸리면 큰 일어날 일이었지만, 걸리지는 않았다. 시간은 야속하게 너무 빨리 갔고, 그렇게 비디오방에서의 일과를 마치면 부대에 가지고 갈 사제품들을 쇼핑을 하고, 6시까지 부대에 복귀를 하는 그런 일정이었다. 나중에는 중간에 일정을 추가해서 친구들도 만났다. 군대 짬밥이 있으니 5시가 아닌 9시 점호 전에만 들어가면 되었으니까. 근데 그게 반복되니 친구들도 다 피하고 부질없더라. 영원한 건 없었다. 하긴 한 가족의 피가 흐르는 부모님도 빈번한 외출과 외박에 애틋한 마음은 없어지고, 힘들어 문을 잠그고 도망가셨으니.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외출 나올 때마다 너무 반갑다며 눈물을 흘리며 너무 좋아하셨고, 따뜻한 밥에 국, 고기와 각종 반찬이 가득한 아침을 먹었다. 무남독녀 외동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노심초사 걱정하며 많은 날을 눈물로 지내셨을 텐데.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오니 얼마나 기쁘셨겠는가. 군대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셨겠는가.
근데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오니, 그게 문제가 됐다. 부모님도 변하더라. 외출 나오는 걸 깜빡하셨다는 핑계로 부랴부랴 대충 있는 반찬에 아침을 주시더니, 집에 안 계시는 횟수가 점차 많이 지셨다. 뭐 나름대로 스케줄이 있으시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지. 근데 현관문 비번을 바꾸는 건 아니잖아 부모 자식 간에. 영원할 줄 알았던 부모님의 사랑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셨다. 서운하지 않았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데. 일주일에 2번의 외출, 매월 2박 3일의 외박, 6개월마다 15박 16일의 정기 휴가, 또 매년 있던 탁구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해서 3박 4일의 특별 포상 휴가. 아들이 군대에 갔는지, 방위로 갔는지,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건지 헷갈리셨을 거다.
지난 몇 년 여러 실패로 가득 찼던 삶에 한풀이라도 하듯이 군 생활은 순조로웠다. 순조롭다기보다, 그동안 유독 나를 외면했던 운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온 것 같았다. 병장이 되니 이제 외출을 나가는 것도 지겨워서, 후임병에게 전령병 일을 물려주고, 부대에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군종병이 곧 제대를 한다고 한다. 후임이 오려면 5-6개월 있어야 된다며 나보고 군종병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또 행운이. 군에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군종병은 진짜로 신이 내린 자리이다. 모든 작업과 훈련에서 열외는 기본,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내 눈에는 그냥 교회에서 놀고먹는 땡 보직 그 자체였다. 딱히 할 일이 없이, 수요예배와 주일 예배 때만 목사님을 돕는 뭐 그런 자리였다. 더군다나 대대장님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 이셔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전문용어로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드디어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제대 후 목표로 하는 편입을 위해 매일 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목사님과 대대장님의 보호아래 밤 잠을 줄이고 설칠 필요도 없이 그것도 교회에서 하루종일 공부를 할 수 있다니, 수많은 행운들이 비껴갔던 나에게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 낯설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은혜도 행운도 지나치면 문제가 되더라. 갑자기 많아진 공부시간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교회 안의 그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낮에 언제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밤에 독서실에서의 치열함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밤에 공부하는 나를 응원한다고, 같은 내무반에 있는 취사병이 매일 밤 정성스레 준비한 라면과 거기에 말아먹을 밥, 파 송송, 그리고 라면과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김치, 계란이 담긴 야식이었다. 공부가 되었겠는가. 라면만 먹고 들어가 그냥 잤다. 거의 매일.
갑자기 찾아온 어색한 행운들. 하지만 앞으로 계획한 일들을 디딤돌로 만들기 위한 치열함과 현재의 평온함을 즐기려는 게으름과의 싸움은 지속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대 날짜가 다가 올 수록 치열한 놈이 게으른 놈을 이기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내일 이면 제대를 한다. 제대를 하고 바로 영등포에 있는 고시원 면접이 있다. 편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남은 시간 구석구석에 치열함을 억지로 구겨 넣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