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남의눈을 많이 의식했습니다. 특히 한 마을에서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회이다 보니, 누구 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친밀해서 그럴까요? 항상 눈치와 염치를 차려야 했지요. 그래서 무언가를 경계할 때도 ‘남의눈이 무섭지도 않으냐’는 말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나의 생각이나 나의 취향, 또는 나의 욕구보다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남의 시선이 훨씬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이목 때문에 진학할 때 좋아하지도 않은 학과를 선택하고, 취업할 때도 딱히 적성에 맞지도 않은 직장이나 직업을 선택하고, 심지어 썩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은 특히 여성들의 패션에서 두드러졌는데요. 지금은 어떤 패션이 유행한다고 해도 우르르 다 따라 하지 않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여성들의 머리 모양, 화장 스타일, 패션 등 모두 유행 따라 일제히 변화하곤 했습니다. 나만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유행에 처지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남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재미있게도 남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걸, 나이 들어 뻔뻔해지는 증거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가령 당시 립스틱은 음식을 먹으면 입술에 별로 색깔이 남아있지 않아서, 식사 후에는 입술 화장을 수정해야 했는데, 화장실에 가서 수정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거울을 들고 수정하면, 소위 남의 시선에 무뎌진 ‘뻔뻔한 아줌마’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줌마’가 삶의 전선에서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는, 이른바 여성성을 잃어버린 제3의 성(性)으로 인식되던 시대였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야말로 남의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예가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헤어롤'로 머리를 고정하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입니다. 심지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 화장까지 합니다. 물론 그런 여성들이 지금처럼 많아지지 않았을 때는,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보기도 했습니다. '아니, 저런 모습을 보일 거면 좀 일찍 일어나서 여유 있게 화장할 시간을 갖지, 왜 공공장소에서 개인의 집처럼 저런 행동을 하냐' 비난을 하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오히려 옆에 앉아 있거나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런 여성과 눈이 마주칠까 봐 '시선처리'에 신경을 써줘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런 젊은이들이 남의 시선에 절대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남의 시선에도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겁니다. 공공장소인 지하철 안에서 헤어롤을 하고 가는 건,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만 완벽한 컬의 예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가 언제 공공장소에서 헤어롤을 하고 있었냐는 듯이 헤어롤을 빼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외에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상관없는 사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러니 굳이 그런 남의 눈치나 시선을 느낄 필요 없이, 내가 하고 싶은 행동,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거지요.
요즘 청춘들에게는 유행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유행은 따라 하지 않으면 내가 유행에 처진다고 생각돼서 따라 하게 되는 건데요. 남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내가 입고 싶은 옷, 내가 입어서 어울리는 옷, 또 내가 입어서 편한 옷을 입고, 그런 신발을 신고, 그런 백을 메고 다닙니다. 예전 중세시대에는 여성들이 남들에게 날씬한 허리를 보이고 싶어서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매다 건강을 해쳤다고 하지요. 지금 베이비 부머들은 젊은 시절에 늘씬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하이힐을 신느라 무지외반에 많이 걸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지금 50+ 중에도 봄가을 환절기 때 나만 '아직 겨울'인 것 같아서, 또는 나만 '벌써 겨울'인 것 같아서 얇은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감기 걸린 적도 꽤 있으실 거예요. 아마 지금 청춘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왜 그런 짓을 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했을까 의아해할 겁니다. 내가 남보다 중요하고,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하니까요.
남의 시선에 맞춰 살아온 세대로서 이렇게 젊어서부터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한 청춘을 마주하면 왠지 부럽기도 한데요. 문득 한편으로는 나이 들면서 그냥 남의 시선에 무뎌지는 게 아니라, 청춘들처럼 남의 시선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흔히 나이 들면 ‘이제 이 나이에 이제 내가 누구 눈치를 보겠어? 하면서 남의 시선에 거리낌 없어진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심지어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미리 바지지퍼를 내리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분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과도하게 남의눈을 의식하며 살아서, 그 반작용으로 나이 들어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물 같게 여겨진다면 곤란합니다. 나이 들면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의 시선만은 의식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나를 조절할 수 있고 아무리 나이 들어도 내 마음이 굳지 않고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 사람 앞에서는 여성 혹은 남성으로 보이고 싶고, 멋지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늙지를 않습니다. 늙는다는 건 단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피부가 탄력을 잃고 주름지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늙을 때 정말 늙는 거예요. 실제 요즘은 나이 들어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욱 멋을 풍기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한 예로 '살림의 여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라이프 코디네이터이자 기업인인 '마사 스튜어트'는 만 81세의 나이로 스포츠 매거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2023년 5월호 수영복 특집의 커버를 장식했는데요. 일부 독자들로부터 '나이에 걸맞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등의 악플을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저도 그 표지를 봤는데,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보면 그냥 수영복을 입은 아름다운 중년 여성의 모습이더군요. 그 후 몇 달 뒤 마사 스튜어트는 한 패션행사의 레드카펫 갈라쇼에 올랐는데, 검정 시스루 미니원피 차림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의 '나이에 걸맞은 옷'에 대한 얘기가 나왔지요. 그러자 마사 스튜어트는 "누구의 나이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가? 난 나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멋있어지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박수를 건네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녀는 자신에게는 물론, 잡지 구독자 또는 패션쇼, 갈라쇼 관중들에게 멋지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멋지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 나이에도 철저한 자기 관리로 건강과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지요. 오히려 50+들은 젊은 시절부터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 보느라 신경 쓰던 걸 좀 내려놓는 것도 필요할 텐데요. 나이 들면서 완전히 남의 시선에
무뎌지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처럼 그 대상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이 들수록 배우자와의 관계가 '가족이어서 거리낌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좋지만, 배우자를 '그 누구에게 보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으로 재정립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