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천생연분 or 평생원수
방송과 인터넷에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부추길 때, 50+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뉩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얘기로 흘려버리든지, 아니면 배우자가 있는데도 같이 갈 친구를 물색하는 거지요. 50+ 중에는 나들이를 하거나 여행하는 단짝으로 배우자를 우선으로 꼽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간혹 배우자와 여행을 다니긴 해도 친구와 여행하는 게 더 재미있다는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 배우자와는 신혼여행 이후로 별로 같이 다니지 않았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어쩌다 자녀들이 부추겨서 부부끼리만 나들이 길에 나섰다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쳐서 ‘다시는 둘이 같이 어디 안 간다!’ 하고 다짐, 또 다짐하고 오신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애들과 같이 갔으면 훨씬 즐거운 나들이 길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그건 오산입니다. 모처럼 온 가족 여행에서 부모가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그 사이에서 눈치 보느라 여행을 즐기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죄랍니까. 자녀들도 다시는 이런 피곤한 나들이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혼한 지 몇십 년 된 부부라고 해도, 젊었을 때부터 부부 둘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았다면,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여행길에서 다투지 않는 게 어쩌면 이상한 겁니다. 신혼 때야 연애감정이 진하게 남아 있어서 가능하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이제 볼 것 안 볼 것 다 본 중년이 되고 나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신혼 때처럼 사랑에 불타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생각에 남한테처럼 예의를 차리지도 않다 보니까, 마음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서로 자기주장부터 앞세우게 되고, 그러다 다투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게 싫어서 부부가 각자 자기 친구들과 따로 여행하는 부부들이 많다는 거예요.
'어? 이거 우리 집 얘긴데?' 하시는 분들은 생각해 보세요. 친구끼리 하는 여행과 부부끼리 하는 여행은, 마음가짐부터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끼리 여행하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애쓰고, 또 서로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않잖아요. 게다가 친구끼리의 여행은 우정뿐 아니라 남자는 남자대로 그들만의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들이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 그녀들만의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게 더 여행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러니 부부끼리 여행이 즐거우려면, 부부 사이이기 때문에 더 좋은 특징들이 많아야 할 텐데요. 신혼 때나 젊었을 때의 불타오르는 사랑은 언감생심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친구끼리 여행할 때처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건 기본으로 갖춰야 불편한 여행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요? 오히려 ‘식구 사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분들을 팽개치고, ‘부부 사이니까 말 안 해도 척하면 삼천리로 알겠지’ 하는 오해로 소통조차 안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부끼리의 여행이 친구들과의 여행처럼 즐거운 여행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가만 보면 친구보다 부부 사이가 가까운 사이인데, 친구끼리의 여행에서는 함께 즐겁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부부끼리의 여행에서는 왜 그런 노력을 생략하는 걸까요? 엄밀히 말하면 친구는 '남'이고, 부부는 '가족'이니까 가족한테 더 잘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남한테 잘하는 것보다 가족한테 잘하는 게 실속 있는 건데도 그러지 않는 건, 아마도 나만 위해 달라는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만약 친구끼리의 여행에서 그런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면, 다음번 친구끼리의 여행에서는 모르면 몰라도 명단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습니다.
부부가 0촌인 것은 참 의미가 깊습니다. 부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가장 친한 사이이지만 서로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남과 다름없잖아요. 흔히 아이들 다 커서 독립하면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하는데요. 정말 그런 부부가 얼마나 될까요? 그 말은 엄밀히 말하면 외형상 식구가 신혼 때처럼 둘로 줄었다는 것이지, 부부 사이가 신혼 때처럼 쳐다보기만 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라는 걸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게 또 있습니다. 아이들 키워 대학에 보내고, 군대 보내고, 그리고 다 독립시키고 나면 힘든 것 다 끝났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동안 정성 들여 마음 쏟던 대상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빈둥지증후군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아내의 경우 마음 붙일 데가 없어진 데다 갱년기 증상까지 겹쳐져서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실은 아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는 남자의 갱년기 증상은 여성에 비해 약해서, 갱년기 증상 하면 여성의 갱년기 증상만 주목했지만, 요즘은 남자도 예전 같지 않게 갱년기 증상으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부부가 서로를 위해 더 마음을 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중년이 된 부부의 사랑이 젊은 시절의 잔재가 아니라, 지금도 최소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더욱이 친한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부부사이에도 통합니다. 간혹 밖에 나가 남들에게는 친절하고 상냥하면서, 집에 들어와 배우자에게는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분들이 계시는데요. 가장 친절해야 하고 상냥해야 할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거야말로 '헛 친절'이고 '헛 상냥’입니다. 부부는 소위 ‘돌아서면 남이 되는 사이’, 유행가 가사처럼 ‘님'에서 점하나 찍으면 '남'이 되는 사이, 현실적으로는 촌수가 없는 ‘무촌’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만큼 예의도 지켜야 그 사랑이 마른 장작처럼 오래오래 불타오를 수 있고, 설사 화려한 불꽃은 꺼져도 숯불처럼 뜨거운 온기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해도 아프지 않아야, 흔히 하는 말로 두 다리에 힘이 있어야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부부가 함께 여행할 날도 많지 않습니다. 나이 50만 먹어도 이런저런 약을 드시는 분들이 많은데, 지금보다 더 나이 들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아플 수도 있고, 또 조금 더 나이 들면 배우자가 옆에 없게 될 수도 있잖아요. 젊어서는 돈 버느라, 또 아이 키울 때는 아이 키우느라 바빠서 둘 만의 여행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 이제야 둘만의 여행을 하려 하니, 어느 한쪽이 아프고, 또 어 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게 바로 인생사입니다. 그러니 서로 건강이 어느 정도 유지될 때 서로에게 맞춰가면서 같이 다녀야 아쉬움이 남지 않게 됩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인데, 지금이 항상 ‘황금기’, ‘골든타임’입니다. 더 늦기 전에 부부끼리 즐겁게 여행하면서 황금기를 누려야지, 둘만 여행하면 싸울까 봐 부부끼리의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다고 하면, 여태 같이 산 세월이 너무 억울하게 됩니다.
결혼할 때는 다들 천생연분으로 생각했을 텐데, 나이 들어 평생원수가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천생연분으로 짝 지어준 삼신할머니가 속상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