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누군가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2020년을 대표하는 트렌드 중 하나가 '느슨한 연대'라고 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 흠칫 놀랐는데, 하나는 오늘 만남을 가질 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항상 지향했던 관계의 지표가 '느슨한 연대'라는 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자란 반경 안에서 취향이 유사하거나, 누구나 공감할 만한 메가 트렌드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나눌만한 동지를 만나는 건 굉장한 행운에 기대야 한다. 인생의 신조가 일치하고 서로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친구, 가족, 배우자, 동료 등 생활인의 반경 안에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 역시 인간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이나 우리는 종종 더 깊은 대화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도 한다. 서로의 역할은 한정되어있기에 의도 없이도 기대를 주고받는 게 익숙한, 함께 일상적인 호흡을 뱉는 사이에서 할 수 없는 말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오히려 낯선 타인의 가벼운 인사말이 그리워지는 날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적자생존의 시대, 모든 인생의 골칫거리와 숙제들을 알아서 받아 들고 해답을 찾아야 하는 냉정한 시대가 도래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트렌드 속 뭐 하나라도 잡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유연함과 빠른 적응력이 필수다. 하나의 역할과 하나의 인격으로 충분치 않다. 상황과 맥락에 맞춰 다양한 내면 속 가장 그럴듯한 나를 시시각각 끌어내야 한다. 그 모든 게 '나'이고 그 모든 게 진심이지만 어쩐지 피곤하고 힘에 붙인다. 불안, 불안하고 싶지 않을수록 불안해진다. 애쓰고 잘할수록 불안이 깊어진다. 그럴 때는 오로지 마음을 나눌 누군가의 느슨한 손길만이 위로가 된다.
세상이 좋아져서 실시간으로 모두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소외되고 고립하기 쉽다. 그와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다정하고 반가운 희망의 고리를 찾아 내 고리를 엮을 수도 있는 그런 희미한 아름다움이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 동네, 우리 학교, 한국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힘을 줄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연대해요.'
1년간 인터넷으로 글을 보며 흠모했던 사람을 오늘 만났다. 만나자고 할 때부터 꿈이 아닐까 아이처럼 설렜다. 일찍 도착한 덕에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기다림을 만끽했다. 누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도 이상하지 않았다. 빨간 코트, 하얀 점퍼, 파란 모자, 검은 목도리,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의 얼굴이 그분으로 보였다. 이내 지나쳐가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떠나면 그제야 낯선 타인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 곁에 서서 성큼 나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 얼굴과 미소를 확인하고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아무 거나 먹어도 좋다는 곤란한 대답에도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며 길을 안내하던 그녀. 바쁜 식당 안 문가 자리에서 나물을 잔뜩 넣고 싹싹 비빈 비빔밥을 말없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파스타나 햄버거가 아니라 점심시간 사람이 빼곡히 가득 찬 식당 한 켠, 참기름 냄새가 솔솔 퍼지고 된장국 향이 은은히 퍼지던 비빔밥 집에서 숟가락으로 밥을 싹싹 맛있게 먹던 그녀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어서 밥이 참 맛있고 든든했다.
그녀를 만나면 애써 오버하거나 있어 보이는 척하지 말자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자고 만나기 전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했다. 그녀를 만난 순간 왼쪽 뇌의 사고 회로가 망가진 듯 무장해제되었고 그 모든 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잡아보려고 해도 마구 나를 지나쳤다. 그 흔한 아스팔트 바닥과 자동차가 있는 풍경이 모두 꿈결 같았다.
그녀가 글을 쓰러 온다던 카페의 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 나눠 먹었던 앙치즈빵 (앙버터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앙버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대답했다), 귀여운 에펠탑 열쇠고리, 함께 걷던 길의 노란 낙엽과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던 그녀의 말,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끊임없이 공부하고자 한다는 그녀의 방향,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다정한 말, 이런 것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문득 SNS와 인터넷 덕분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이렇게 글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고 나누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털끝만큼의 불편한 구석 하나 없이 행복감과 밝음만으로 가득 찬 마음을 만들어준 이 만남이 너무 소중해서 눈가가 아렸다. 아마 그녀가 한국에 없으면 그녀가 소개해준 그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쓰며 그녀를 그리워하겠지. 처음 만난 그녀지만 첫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년 기다리게 되고 늘 봐도 설레고 항상 만나볼 수 없는 차가운 날의 따스한 첫눈. 나는 이 만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그리워하겠지.
어떤 만남은 꼭 글을 쓰고 싶게 하고 그곳에는 항상 느슨한 연대감이 존재한다. 얼굴도 생활도 일상도 잘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사이들. 언제 헤어지고 언제 멀어져도 탓할 수 없지만 늘 함께한다는 든든함을 주는 관계들. 결국 누군가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람이 만나고 사람이 하는 일만이 한 사람을 깊이 행복하게 하고 숨통을 트이게 하고 넓은 평야의 익어가는 곡식처럼 충만함을 품게 한다. 앞으로의 나날이 아니 곳곳에서 피어날 '느슨한 연대'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다.
P.S.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그녀 다운 인생을 앞으로도 살아가길 마음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