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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Apr 09. 2024

#4. 좋아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

약과 공장

  나는 약과를 싫어한다. 약과의 달고 쫀득한 맛이 싫어서가 아니다. 미끈미끈한 기름 냄새와 느끼한 물엿의 기억이 나를 초등학교 4학년 때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한 겨울이었던 것 같다. 집 앞에 큰 건물이 들어서더니 몇 명의 어른들이 하나둘씩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것처럼, 기름 냄새가 온 동네를 덮었다. 나는 그날도 친구들과 신나게 눈싸움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키 작은 아저씨가 우리에게 오더니 "너희 아르바이트하지 않을래? 한 시간에 2,000원 줄게." "2,000원이요?" "저 할래요" "저도요" "야, 내가 먼저야." 우리들은 서로 그 아저씨가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서로 자신이 최고의 적임자라는 것을 손과 몸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지금은 2,000원이 노동착취로 생각할 만큼 작은 돈이었지만, 그때 과자 한 봉지가 300원, 오락실에서 오락 한 판이 50원인 것을 고려하면 초등학생들에게 2,000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선악과 같은 것이었다.


 약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밀가루를 물과 함께 기계에 넣고 여러 번 반죽한다. 반죽한 밀가루는 모형 틀에 넣어서 약과 모양으로 찍어낸 후, 큰 채 위에 올려놓고 팔팔 끊는 기름에 한 번에 튀긴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한 후 며칠 약과를 건조한다. 잘 건조된 약과는 물엿으로 입어지고 다시 건조의 과정을 거치면 약과가 된다. 완성된 약과는 귤 혹은 사과 상자에 담겨서 한 곳에 보관되었다가, 필요한 수량만큼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서 포장된다. 처음에는 약과를 만드는 것이 신기하고 공짜로 약과를 먹으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초등학생에게 한두 번의 경험으로는 충분했다. 맛있는 솜사탕도 한두 번 계속 먹다 보면 버리게 되는 것처럼, 약과의 달콤한 유혹은 어느새 나의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명령으로 바뀌면서 방학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방학 때가 되면 아침 8:00에 약과 공장으로 출근했다. 어떤 날은 구운 약과를 건조장으로 옮기기도 하고, 하루 종일 앉아서 약과를 포장하기도 했다. 공장에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형제들(큰형만 빼고 모두. 왜 큰형만 약과 공장을 다니지 않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이 방학 때마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공장장이 아버지를 찾아와서는 "아이고, 목사님! 자녀분들이 아주 일을 열심히 잘하네요. 공장으로 꼭 보내주세요. 저희가 조금 더 돈을 줄 테니, 잘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들을 돈 때문에, 공장에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이상한 격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약과 공장의 생활은 초등학교 학생이 경험하기는 너무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뜨거운 약과를 옮기다가 기름에 데기도 하고,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서 약과를 포장하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서 울기도 했다.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다가 보면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도 여러 번 들었다. 약과를 플라스틱 포장에 넣고 스테이플러로 찍다 보면 날카로운 포장지에 찔려서 피가 나기도 하고, 스테이플러를 손에 박아서 소리를 지를 때도 있었다. 약과 상자를 옮기다가 머리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한겨울에는 창고 같은 작업 공간에서 추워서 떨기도 했고, 한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땀을 비 오듯 흘리기도 했다. 그때는 공장 환경이 좋지 않아서 환풍기나 에어컨 그리고 밝은 등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이 열악했다.  


  어느 날 공장장이 나와 쌍둥이 형을 불렀다. 왜 그가 우리를 불렀고, 어떻게 우리가 그곳에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 우리는 소라 과자를 만드는 공장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 파견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도 초등학교 때에 말이다. 나에게 파견은 발에 맞지도 않는 긴 장화를 신고 수 없이 쏟아지는 소라 과자 속으로 들어가 삽으로 과자를 퍼 나르는 것이었다. 나는 소라 과자를 가장 좋아했다. 아삭거리면서 적당하게 단맛을 내는 귀여운 모양의 과자는 나의 기호 식품이었다. 하지만 소라 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한 후로 나는 도저히 이 녀석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었다. 소라 과자는 내가 싫어하는 두 번째 과자가 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약과 공장 생활을 5년 정도 했던 것 같다.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긴 시간 공장 생활을 한 것이 아버지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크게 혼나서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는 나에게 그 어떤 선택권도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약과 공장에서 나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약과 공장이 나에게 아픈 기억만을 남겨 놓은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 일하면서 어린 나이에 뽕짝(트로트)이 얼마나 고된 일상에 힘이 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원더풀~원더풀~아빠의 인생." 몸과 사건이 만나면 기억이 된다. 나에게 뽕짝은 약과 공장의 힘든 생활을 위로해 주는 흥이 나는 가락이다. 지금도 그 가락을 우연히라도 듣는 날이면 나의 몸은 어느새 의정부시 가능1동 약과 공장의 어느 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기름진 공기를 맡으며 끈적거리는 손을 가지고 약과를 8시간 포장하면서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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