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소나 Apr 09. 2024

#3. 전주댁

엄마는 김치 여왕이었다.

  여기서 잠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멈추고 엄마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비 내리는 어두운 뒷골목의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를 걷는 기분이라면 너무 우울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전개될 롤러코스터와 같은 실패의 이야기를 담이 걸린 것 같은 불편한 심정으로 떠들어 대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호칭부터 '아버지'와 대비된 것부터 기분이 별로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아빠로 불러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엄마도 어머니로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엄마의 호칭 차이는 형제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나름 선택한 전략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권위적이면서, 무섭고, 딱딱한 분위기가 난다. 반면 엄마는 억눌렸던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포근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으로 미소 짓게 하는 이름이다.


  엄마는 요리를 잘하셨다.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하셨다. 누군가 "너희 엄마는 어쩜 음식을 맛있게 하시니?"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엄마는 전주 출신이세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길을 걷다가 "어디서 밥을 먹지?"라고 고민할 때 '전주집, ' '전주 밥상, ' '전주비빔밥'의 간판을 보고 들어간 곳은 적어도 밥값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이 경험은 엄마가 전주 출신이라는 사실과 함께 나의 기억 속에서 "전주 출신은 음식을 맛있게 한다."라는 사실로 정립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음식을 잘하시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먹성 좋은 육 남매의 식탁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엄마가 음식을 만드셔야 했기 때문이다. 형과 누나가 학교 다닐 때 자율학습이 있었다. 말이 자율이지 수업이 끝나면 모든 학생은 10시까지 남아서 공부해야만 했다. 어느 학교는 자율학습을 12시까지 하는 곳도 있다는 무서운 소문도 들었다. 어느 날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부엌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새벽 5:30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서커스 같은 장면이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엄마가 쪼그리고 앉으셔서 양푼이 도시락(사각형으로 된 옛날 도시락) 10개(큰누나 3개, 큰형 3개, 작은형 2개, 작은누나 2개)를 싸고 계셨다. 그때는 큰누나하고 큰형은 모두 돼지인 줄 알았다.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3개나 가져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각났다. "주 5일의 반찬은 무엇이었을까?"




  엄마 요리의 정수는 김치다. 갓김치, 배추김치, 파김치, 열무김치, 백김치, 깍두기, 박지, 깻잎, 오이소박이, 무말랭이. 나는 김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엄마가 싸시는 반찬을 통해서 알았다. 지금은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그때는 김치가 너무 싫었다. 하나가 싫으면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이 싫은 법이다. 김치도 그랬다. 매일 다른 반찬이 김치라고 생각해 보자. 친구들 도시락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반찬들로 향연을 이룬다. 노란빛을 뽐내는 계란말이, 모양도 이쁘지만, 맛도 끝내주는 스팸, 바다 맛의 으뜸 오징어볶음. 하지만 단연 최고의 반찬은 프랑크 소시지다. 누군가 소시지를 싸 오는 순간 그 녀석은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여로 추앙받는다. 모든 친구 부러움의 눈치와 환호성으로 이들 주위로 몰려든다. 그리고 외친다, "하나만 줘!" "나도!" "제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김치 형제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도시락은 정성과 사랑이었지만, 우리에게 엄마의 마음은 밥과 김치 뒤에 꼭꼭 숨어있어서 찾을 수 없는 맛없는 도시락에 불과했다. 엄마에게 김치는 자신의 인생이었다. 김치를 담그는 것은 수많은 작업을 요한다. 먼저 속이 꽉 찬 배추를 선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거나 지저분한 배추의 잎은 덜어내고, 칼로 절반을 자른 후 깨끗이 배추를 씻는다. 그리고 소금으로 배추의 숨을 죽인다. 그러면 교만했던 배추의 목은 겸손해져서 엄마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갖은양념을 자신의 가슴에 품는다. 이렇게 배추와 양념은 엄마의 시간과 정성 그리고 자식을 향한 사랑과 함께 빨갛고, 빛깔 좋은 전주댁 김치로 태어난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는 데 자신의 인생을 모두 쏟아부으셨다. 배추가 김치가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작업이 필요한 것처럼, 엄마의 인생도 그랬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아버지의 목회 활동을 위해서 희생하셨다.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이면 아무런 말씀 없이 동행하셨다. 가난한 개척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목회에 전념하실 때, 엄마는 가족을 챙겼다. 돈이 필요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 육 남매를 뒷바라지하는 것도, 교회 청소와 전도도 엄마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교회의 마당에 심긴 온갖 채소들을 키우고, 다듬고, 관리하는 것도 엄마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배추가 소금으로 숨이 죽는 것처럼 엄마는 아버지, 자식,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죽이고 죽이셨다. 숨 죽은 엄마의 인생은 아버지의 잔소리, 형제들의 불평, 교인들의 하소연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더 맛있게 익어갔다. 그랬다. 이제야 알았다. 엄마가 전주댁인 것은 엄마가 전주 출신이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을 다듬고, 자르고, 숨죽이고, 양념하면서 그 속에 "나도 나의 인생이 있다"는 외침이 그녀를 전주댁으로 만든 것이었다. 엄마의 김치가 새벽에 홀로 흘리신 눈물의 소금과 가족들조차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의 양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혼자 밥과 김치를 먹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