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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Apr 23. 2024

#9. 검정고시

공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저기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저요?"

"네!"

"무슨 일이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나서는데, 민머리를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선다. 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빈 교실로 데리고 갔다.


"몇 살이세요?"

"17살이요."

"아, 저보다 4살 어리네요."

"아, 네... 그런데 왜 보자고 하셨어요?"

"그게..."


조금은 위압감을 보이는 민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달걀형 얼굴과 쌍꺼풀 없는 눈 그리고 애매한 눈꼬리는 선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결의찬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왜 검정고시를 하세요?"

"고등학교 떨어져서요."

"그렇군요. 저 혹시 저하고 같이 공부하실래요?"

"네?"

"제가 목포에서 올라왔어요. 그곳에서 깡패 생활을 하다가 이제 마음먹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을 찾다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는 거예요. 수능 준비하실 거죠?"

"네, 그렇기는 한데..."

"그럼 저하고 같이 공부하죠. 나도 공부를 처음 시작하니까 같이 공부하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이 형의 명령 같은 요청에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그렇다.


"네!"


나는 A형이 싫어서 O형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황당한 기도를 해본 적도 있다. 내가 알고 있던 O형은 성격도 좋고, 말도 잘하면서, 잘 토라지지도 않는 이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한 그 짧은 한마디가 나의 인생에서 마법의 단어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나는 나의 혈액형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나의 선택 아닌 선택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형은 나에게 성문 기초영문법을 사서 공부하자고 했다. 둘 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려운 것이 있으면 물어보면서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형이 말한 책을 중고로 구매한 후 다짐을 했다.


"그래, 해보자. 약과 공장과 신문 배달보다 힘들겠어? 마음만 먹으면 된다."


공부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 공부를 조금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공부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앞으로 공부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할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언급하기로 하자. 공부 방법을 몰랐던 공린이(공부 어린이)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겁 없이 공부를 해보겠다고 달려들었다.


"지금 시간이 2:00이니 딱 한 시간만 공부하고 쉬자."


먼저 영문법 책의 표지를 살펴본다. 한 장을 넘겨서 목차와 파트별 페이지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는다. 저자의 집필 목차도 놓치지 않고 정독한다. 제1장 품사... 품사? 일단 제목부터 재미가 없다.  


"품사가 뭐지?"


책을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부 의지는 100%인데 머리는 돌아가는 것 같지도 않았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나는 형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화장실에 가면 괜히 공부에서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 공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갈증이 났다. 몸도 괜히 어디가 아픈 것처럼 불편했다. 불규칙한 심호흡과 식은땀은 나의 몸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버티고 버텨서 한 시간을 참았다. 그리고 힐끗 형을 봤다.


"어? 뭐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부하네."


태어나서 5분도 앉아서 공부해 보지 않았던 내가 무려 한 시간이나 공부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개선장군처럼 문으로 나서려고 일어섰다. 그리고 시계를 봤다. 2시 15분. 내가 공부를 시작한 것이 두 시인데, 두시 십오 분?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시계는 정확히 2:15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지? 분명 한 시간이 지났다는데. 그렇게 버티면서 앉아 있었는데, 겨우 15분?"


일단 몸이 힘들어서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을 갔다 온 후 물을 마시면서 생각해 봤다. 왜 나는 한 시간이 지났다고 느꼈는데, 겨우 15분만 지났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형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어? 안 힘들어?"

"그냥 하는 거지. 힘들지. 그런데 어떡하냐. 늦게 시작했으니 더 해야지."


다시 앉아서 공부를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면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나고, 화장실에 가고 싶고, 하품이 나오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글자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부하려는 마음과 생각은 이미 검정고시 시험을 통과해서 대입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감옥에 가두고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강제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공부와 포기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왔다.


"앉아 있는 습관이 없으면 공부를 못하는 거 아니야? 일단 버티자."


다음 날부터 앉아 있는 연습을 했다. 10분 버티기. 말이 10분이지 공부를 해보지 않은 친구들에게 재미없는 책을 10분씩이나 보는 것은 지옥이다.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갈증이 난다. 누가 혼내지도 않았는데 식은땀도 흐른다. 버티고 계속 버틴다.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극기 훈련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10분을 버틴다고 자신과 약속했으니, 무조건 버텨야 한다. 10분이 되면, 나는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이제는 살 것 같다."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추슬러보지만,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 막막했다. 처음부터 공부는 나하고 맞지 않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후 풀이 죽은 채로, 다시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30분만 버티고 그만두자. 난 공부할 머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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