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고서는 미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SES와 핑클 중 누가 더 좋냐?"
"네? 누군데요?"
"넌 뭐냐? 정말 몰라?"
'네..."
군대 선임자의 갑작스러운 질문 이후 나는 SES가 어떤 그룹인지 찾아봤다. 세 명으로 구성된 1세대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 바다는 리드 보컬, 유진과 슈는 보컬로 활동하는 SM 최초의 걸 그룹이었다. 내가 이들을 처음 본 것은 TV 가요 20(1994년~1998년까지 방영된 SBS 음악 프로그램)에서였다. 나는 유진이가 춤을 추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빙긋이 웃는 그녀의 모습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유진이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너무 길었고,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은 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내 사랑 유진"
그날은 SES가 신곡을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최대한 빨리 그날 해야 할 목표를 끝내고 목청껏 유진이를 응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다. 집중하면 보는 것마다 이해되고 암기도 잘 됐다. 그렇게 공부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SES 나왔다."
내무실은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한 목소리로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사랑해요! SES! 사랑해요, 유진!"
그렇다. 유진은 사랑이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나는 144시간을 손가락으로 계산하면서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유진에 대한 기대감은 힘든 군 생활을 견디는데 적지 않은 위로가 됐다. 그런데 고작 지금 하는 공부 때문에 그녀를 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리라.
"무슨 공부야! 유진이지! 지금 내려갑니다."
황홀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뛰었고,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났다.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하다 보니 등에는 땀까지 흘렀다.
"사랑해요, 유진! 나의 사랑 유진! SES! SES!"
몇 분 동안 나의 사랑을 모두 유진에게 쏟아붓고 나서, 나는 다시 책이 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앉아서 책을 보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왔다. 분명 SES의 동작 하나에 희열을 느꼈고, 세 명의 천사와 함께 천국에 갔다 왔는데, 그 행복한 시간이 지금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지면서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좋았고, 행복했고, 즐거웠는데 허무함이 어디서, 어떻게, 왜 그리고 그 순간 들었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번쩍이면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유진이는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교훈을 알려주었다. 내가 SES를 아주 좋아했지만, 그 미친 감정과 에너지가 단 몇 분 만에 분출된 후 남은 것은 당시의 감정과 현재의 기분에 만족한 것이 전부였다. 나는 내 감정의 만족을 선택했고, 욕망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에 도취했다. 그랬다. 나는 쾌락을 선택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열정 보다 순간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정신적으로 텅 빈 상태를 경험하고 나서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EPL(English Premier League)의 손흥민 경기를 제외하고 거의 TV를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진이가 나의 귀에 속삭이던 허무함의 메시지는 내가 세운 목표를 더 미친 듯이 달려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 여름이면 강한 햇볕으로 함정의 침실 온도는 40도(오래된 함선으로 침실에는 선풍이 한 대가 전부였다.)가 넘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저녁 10시 이후 선임자들에게 공부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이 나오는 볼펜의 불빛을 스탠드 삼아 하루에 삼십 분씩 영어단어를 외웠다. 너무 더워서 살짝 이불을 들추고 싶다가도 참고 다시 단어를 외웠다. 이렇게 몇 개월 심야 공부를 하면서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달았다.
"미치지 않고서는 미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모두의 계산을 넘어서는 불가능에서 나온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미리 걱정하면 못 한다.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삼십 분 나는 매일 저녁 땀으로 샤워하면서 단어를 암기했다.
처음 천자문을 외울 때는 하늘 天, 따 地, 검을 玄, 누를 黃의 순서로 외웠다. 이 주일이 지나고 처음 외웠던 것을 다시 보는데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글의 70%가 한자라는 말이 문뜩 생각이 나면서, 나는 평소 알고 있는 단어 중 한자로 된 단어를 찾아서 외웠다. 그렇게 한 단어씩 찾아가면서 내가 무심코 사용했던 한글의 뜻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더 잘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고 찾은 단어인 만큼 암기도 잘 됐다. 하루 전에 외웠던 단어는 그다음 날 요리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써보기도 하고, 머리로 수백 번 그려보면서 암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천 개가 되는 한자를 다 외웠다.
독서 100권은 가장 난도가 높았다. 처음에는 베스트셀러를 찾아서 읽었다. 책을 앉아서 오랫동안 읽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두꺼운 책은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얇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랐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일병 중간 호봉 정도가 됐기 때문에 나는 밥이 뜸이 드는 동안, 반찬을 만들고 배식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빨리 먹고 다른 병사들이 밥을 먹는 동안의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얼마나 책을 열심히 봤는지 지나가는 간부들과 선임자들이 "너는 책 보러 군대 왔냐?"라고 혼낼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시작한 독서는 한 가지 독서 방법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책은 책을 물고 온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책, 추천할 만한 책,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 등을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곤 한다. 나는 그것을 메모지에 받아 적었다가 그다음 읽어야 할 책의 목록으로 정리해 두었다. 그렇게 찾게 된 책은 다른 책을 물고 오고, 그다음 책은 또 다른 책을 자연스럽게 물어 오면서 나는 크게 힘들지 않고 좋은 책을 읽게 되었다. 관심이 있는 책이다 보니 읽는 재미도 있었고, 독해력도 빨라지면서 생각하는 훈련도 향상되었다. 무엇보다 군 제대 이후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배를 2년 정도 탔다. 그 기간 하루 쉬는 시간은 많아야 두 시간 정도였다. 그 시간도 모두 자투리 시간을 모아 놓은 것이었고, 무엇 하나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나는 한다고 결심했고, 그냥 했다.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핑계라고 생각했다.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약한 마음에서 나오고, 불가능은 이미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나약한 근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했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정말 됐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불가능한 시간과 환경 속에서 천자문을 외웠고, 영어단어 22,000개, 책 100권을 읽었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를 질투했다. 그들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간단했다. 나는 계획한 것을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기필코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고, 그들은 생각만 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제대 이후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작은 성공은 더 큰 성공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사진 출처: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