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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세계, 스토리 #1. 동주의 여름, 스물의 여름

윤고은의 EBS북카페, 여름 특집

by 최동민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에서 많은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동주의 여름, 스물의 여름>대본집

윤고은의 EBS북카페, 여름 특집




S#1. 그 이름이 고운 사람들


음악 : <Track 5> 이소라

해질 무렵 하늘 봐 그 위로 흐르는 밤

푸르짙어 별그물 설킨 어둔강


까만 밤 빛나는 별 내 눈에는 그렁별

울다 기뻐 웃다 슬퍼 마음이 지어준 낱말들


그 이름이 고운 사람들

김광석이나 byron, Eliot Smith, 윤동주..


난 새롭거나 모나지 않은 말 주워

좀 외롭거나 생각이 많은 날 누워

내 음을 실어 내 말을 빌어서 부른다



황인찬 :

"애기, 산울림, 병아리, 나무, 조개, 바다. 달 조각, 그믐, 반딧불... 숨결, 소복, 새물새물, 처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음악 : <Track 5> 이소라


음 차가운 말 음 살가운 말 음 따가운 말 음 반가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말


윤고은 :

중국 북간도의 작은 마을 '명동촌.'

그곳은 겨울을 닮아 있었다.

산이 겨울의 팔짱처럼 웅크리고있던 그곳.

그곳에서 동주는 어머니의 슬하에 웅크린 채,

눈과 바람, 어둠과 늑대를 피했다.

겨울에 태어난 동주.

그래서 겨울을 닮았던 그의 앞에는 얼음이 한 장.

두 장. 또 한 장. 겹쳐 있었다.

투명하지만 두꺼운. 똑똑. 가벼운 노크 정도로는 깨지지 않을.

그 얼음의 천장을 바라보며 동주는,

썼다.


황인찬 :

<애기의 새벽> 윤동주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음악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요조, 이상순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닿지 않는 천장에 손을 뻗어 보았지

별을

진짜 별을 손으로 딸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럼 너의 앞에 한 쪽만 무릎꿇고

저 멀고 먼 하늘의 끝 빛나는 작은 별

너에게 줄게

다녀올게

말할수 있을텐데


윤고은 :

국경 너머 중국 북간도의 명동촌.

뜻있는 학자들의 결심으로 세워진 그곳은 동주의 고향이었다. 한 해, 또 한 해. 몇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곳은 동주의 고향이었다.

동주의 집은 기와 아래 있었다. 그래서 안락했다.

집에 들어서기 전, 동주는 밤하늘이 잘 보이는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럴때면 보이는 별과 별.

그 사이를 선처럼 이으며 동주는 그렸다.

첫 해의 겨울밤엔 작은 곰을,

다음 해 겨울 밤엔 동무들의 얼굴을,

그 다음 겨울 밤엔 고향의 지도를,

그렇게 별을 잇다보면 동주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면 어느 새...


황인찬 :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라, 릴리, 창포, 튤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달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윤고은 :

꽃이 피어있었다.


황인찬 :

여기에 화원이 있습니다. 노트 장을 적시는 것보다 한우충동에 묻혀 글줄과 씨름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효과적인 성과가 있을지를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을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참말 나는 온정으로 이들을 대할 수 있고 그들은 나를 웃음으로 맞아 줍니다. 그 웃음을 눈물로 대한다는 것은 나의 감사일까요. 고독 정숙도 확실히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여기에도 또 서로 마음을 주는 동무가 있는 것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고은 :

동주와 같은 겨울, 싹을 틔운 이가 있었다. 몽규라는 이름의 동무.

명동에서 함께 나고 자란 두 사람은 닮은 듯 달랐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동주가 홀로 별을 바라보고 글 쓰는 것을 즐겼다면

목소리 크고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몽규는 그 자체로 별이었다.


언제나 한 두 계단 높은 곳에 먼저 가있던 몽규.

소년일 땐 청년으로 보였고, 청년일땐 어른으로 보였던 몽규.

공부도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었던 몽규.

그래서 고요보다는 환호가 어울렸던,

일찍 피고 영원히 펴있을 것 같았던...

몽규.


동주.

그는 그런 몽규를 보며 꽃의 샘을 닮은 질투를 하곤 했다.

그런 샘에 얼굴이 달아오를때면 또 몇 편의 시를 썼는지.

동주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황인찬 :

"나무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데..."


윤고은 :

동주는 나무 아래 앉아 생각했다.

멀리 몽규의 그림자가 꼿꼿이 서서 걸었다..




#2. 그대는 나무 같아



음악 : <그대는 나무 같아> 박지윤

그대는 나무 같아

그대는 나무 같아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햇살을 머금고 노래해


내게

봄이 오고

여름 가고

가을 겨울

내게 말을 걸어 준 그대


그대는 나무 같아

그대는 나무 같아

사랑도 나뭇잎 처럼

언젠간 떨어져 버리네

쓰르르르

쓰르쓰르쓰르르쓰르

쓰르르르쓰르르


황인찬 :

<나무> 윤동주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윤고은 :

동주는 스스로를 나무라 생각했다.

조용하고, 머뭇거리고, 가만한.

그런 자신과 나무가 퍽 닮아 있다 믿었다.


하지만 소년의 품에 늘상 이는 것들.

치기, 무모, 용기, 설렘과 같은 불씨가 그에게 없을리 없었다.

그래서일까.

동주가 쓴 모든 동시의 주인은 동주였다.

나무를 예로 들어보자. 동주는 나무에 자신을 대입했고,

자신의 세상의 중심인 듯 시를썼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지 않는다.

춤을 추기에 바람이 부는 것이다.

바람이 잠들어 나무가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잠잠해져 비로소 바람이 자는 것이다.


동주는 그렇게 썼다.

자신에 의해 썼고, 자신을 위해 썼다.

그리고 자신을 썼다.

그 시기부터였다. 동주가 자신의 시에 날짜와 이름을 적기 시작한 것은.

그건 시인이 되고자 하는 소년의 출사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비록 그 시기, 몽규는 신문사에 보낸 꽁트가 당선되어 습작 노트가 아닌 신문에 이름이 적혔지만 말이다.

그 소식을 들은 동주는 일어섰다. 그리고 툭툭, 흙과 함께 질투를 털어내며 말했다.


황인찬 :

"대기가 만성이다."



#3. 밤기차



음악 : <Train> 베란다 프로젝트

서둘러 올라선 밤기차에

말 없이 무표정한 사람들

구석진 창가에 내 몸을 묻은 채

또 난 난 나는 떠난다


조금씩 멀어지는 도시와

이윽고 낯설어진 이정표

어디서 끝이 날지 모르는 여정

또 난 난 나는 떠난다


떠나온 걸까 떠나가는 걸까

옅은 잠에서 눈뜨면 또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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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지만 말수가 적습니다. 그래서 소설 혹은 산문을 씁니다. 그렇게 매일의 한숨을 돌리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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