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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06. 2020

활동가의 기쁨과 슬픔

활동가의 가난과 헌신은 당연한 일도 불쌍한 것도 아니다


활동가도 그냥 사람


정의연/윤미향 관련 논란으로 시끄러울 때 활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기사가 있다. 정의연 활동가들과 참여연대, 경실련 활동가들의 연봉을 비교한 문화일보 기사다. 요는 경실련의 평균 임금은 2310만 원인데 정의연 활동가들의 평균 임금은 3147만 원이라고, 그래서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경실련보다 800여만 원이나 더 받으니 정의연의 근무환경이 열악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기본적인 취재도 안 되어 사실관계가 제대로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기사라서 뭐 언급할 값어치가 있겠나 싶을 정도다. 어처구니없어 헛웃음도 안 나왔다. 그런데도 굳이 언급한 까닭은, 왜곡과 게으름의 바탕에 깔린 활동가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활동가는 지지리 가난해야 한다는 그 관념 말이다.


그런데 비슷한 편견은 활동가를 옹호하는 의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논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던 송경용 신부님의 글이 대표적이다. 오해는 마시라. 나를 비롯해 많은 활동가들은 그 글이 참 고마왔고, 그 글에 위로받았고,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삐뚤어진 생각도 들었는데, 송경용 신부님이 활동가에 대한 사회의 오해를 풀기 위해 활동가들의 평균적인 처우나 노동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틀린 말 하나 없고 공익활동가협동조합 동행의 이사장인 만큼 절절한 고민이 묻어나는 글이었지만, 마치 '활동가는 가난하고 헌신적으로 살아야 해. 그게 당연한 거야'로 읽힐 것만 같았다. 송경용 신부님이 글 쓴 의도는 절대 그러하지 않다는 걸 잘 알지만 왜 우리가 불쌍하게 보여야 하는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일이 다 힘들고 헌신한다. 물론 직업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개인마다 차이도 있고 더러는 그 차이가 크지만, 보통의 생활인들은 다들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일한다. 새벽부터 연습하는 아이돌 연습생이 활동가보다 덜 노력한다고 할 수 있나?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도시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하루는 활동가들의 하루보다 덜 헌신적인가? 나는 활동가를 특별하게 보는 시선이 오히려 활동가를 납작하게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다른 직업인들, 다른 노동자들처럼 우리도 일하고 노동하고 생활하는 보통 사람이다.


야구 선수들 중에도 노력을 더 하고 덜 하는 사람이 있듯이 활동가들 중에서 더 헌신하거나 덜 헌신하는 사람이 있고, 회사원들 중에도 커다란 야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듯이 활동가들 중에도 큰 일에 대한 야망이 있는 사람과 현재에 충실하며 만족하는 사람이 섞여 있다. 공무원 중에서 그 일이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쩌다 공무원이 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활동가가 꿈이었던 사람도 있지만 살다 보니 활동가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물론 활동가라는 직업의 특성이 당연히 존재하지만, 어느 직업이든 특성은 존재하고, 각각 고유한 특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어느 직업만 유별나게 특별할 건 없다는 말이다.


활동가의 특성이라고 흔히 여겨지는 가난과 헌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서정주가 가난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서정주 말마따나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직업은 각자만의 남루를 가지고 있고, 활동가에겐 그 남루함이 가난함일 따름이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으니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면서 어떤 것은 버리는데, 나는 부유함을 버리고 다른 것들을 택했을 뿐이다. 헌신은, 이건 정말 헌신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문화는 이제 극복해야 하는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헌신하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요즘 밀고 있는 표현이다!)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활동가들의 가난과 헌신을 특별히 칭송하거나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또한 과도하게 감정을 넣어 가난하고 헌신하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래 이렇게 딱딱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원래는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다른 활동가들은 어떨 때 기쁘고 어떨 때 슬픈지 모르겠다. 궁금하다. 나는 그저 나의 기쁨과 슬픔을 살짝 드러내 보고 싶다.



활동가의 기쁨


기쁨은 의외로 소박한 순간에 찾아온다. 헌법재판소에서 병역법에 대해 위헌 취지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 나는 덤덤했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우리에게 기뻐 날뛰는 모습을 연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오히려 커다란 기쁨은 라디오를 들을 때 DJ의 아무것도 아닌 멘트에서 발견했다. DJ가 내가 보낸 사연을 읽으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병역거부"라고 말할 때, 나는 드디어 내 활동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기뻤다. 법과 제도가 바뀌는 순간보다, 사소하고 소박한 사회의 한 풍경이 바뀐 장면이 내 마음에 더 깊게 들어왔다.


예비 병역거부자 모임에서 빛나던 눈동자들도 나를 가슴 뛰게 했다. 몇몇은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다녀왔거나 지금 열심히 재판을 받고 있고 몇몇은 병역거부를 포기했지만(부디 병역거부를 포기한 일이 마음의 생채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 모두의 불안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확신이나 단호함이 들어있는 눈빛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기쁨과는 좀 다른 보람 혹은 이 일을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나의 일이 누군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감각은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비밀상자처럼, 설레고 두려운 일이다.


기쁨은 때로는 서늘한 밤공기로 목 뒤 덜미에 찾아든다. 힘든 행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료들이 조용히, 다정하게 "고생했다"고 보내는 문자에 실린 마음들을 확인할 때, 혹은 라디오 DJ의 입을 통해 나의 노고를 따뜻하게 위로받을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고 의미를 갖게 된다. 뭐 이건 꼭 활동가가 아니라, 다른 직업인들도 마찬가지일 거 같다.



활동가의 슬픔


활동가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편견이나 혐오에 맞서는 일이 많다. 그때 그런 혐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곤 한다. 나는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부터 악플에 단련이 되어 있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쌓이다 보니 정신 건강에 결코 좋지 않더라. 그래도 대부분은 그냥 짜증 나고 말뿐이다. 하지만 가끔씩 혐오나 위협의 말 뒤에 숨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서글퍼진다. 이 증오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까지 증오할까. 이해할 수 없어 슬프고, 해결할 수 없어 슬프다. 그런 사람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 논쟁할 수 없다. 공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상황이 못 견디겠어서 슬프다.


그보다 더 빈번히 일어나고 더 아픈 일은 동료들이 떠날 때다. 다양한 이유로 활동가들이 떠나는데, 때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동료도 있다. 그런 경우는 슬픈 건 아니고, 다만 아쉬울 뿐인데, 어쩌나.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니 응원할 따름이다. 많은 경우는 좋지 않은 이유로 떠나게 된다. 어느 일이든 사람이 가장 귀하고 든 자리는 티가 나는 법이라지만, 이 바닥은 사람이 원체 없어서 한 명이 빠진 자리는 크게 티가 난다. 경제적인 이유, 건강상의 이유, 개인적인 이유, 운동 사회 내부의 문제 때문에 떠나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용히 읊조린다. 그러나 문득 나 때문에 떠난 이들도 있다는 자각이 들 때면 더할 수 없이 슬퍼진다. 그런 날은 혼자서라도 술을 마신다.

 

동료들이 떠나는 가장 잦은 이유 중 하나는 건강 때문이다. 이걸 활동가의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나? 있다. 일하다 아픈 사람은 어느 업계에나 있지만 이게 유독 활동가들에 슬픈 일이 되는 건, 가난 때문이다. 평소에는 남루에 지나지 않던 가난이 아플 때는 굉장히 큰일이 되어버린다. 남들처럼 보험을 이것저것 들어놓지도 않고 저축을 쌓아놓지도 않은 활동가들에겐 아픈 건, 몸이 아픈 것 이상의 고통이 된다. 그래서 활동가들의 가난을 불쌍하게 봐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활동가를 노동자로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건강 상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대해가는 게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조금 샜는데, 아무튼 활동가 동료들이 아플 때 나는 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요즘 들어 내 주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활동가들이 아픈 소식이 자주 들려, 나는 마구 흔들린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고. 노랫말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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