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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닮은 책

어느 책장 편집자의 고백: 회고록

by 뭉클


"책을 읽고 또 읽고, 정말 책만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이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 줄, 나 자신으로부터 꺼내 줄 유일한 것이었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1873-1954)




세상에 나보다 책을 많이 보는 사람, 좋은 책을 많이 알고 지식이 흘러넘치는 사람은 많다. 그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뭘까. 그 질문에 대해 내가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로 답한다.


매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n명과 n개의 대화를 한다. 책장 편집을 시작하던 해, 아이들의 성향과 진로, 좋아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책을 한 권씩 골라줬다. 그 시도가 생각보다 더 무모한 짓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추천한다'는 콘셉트를 처음 떠올렸을 때는 엄청난 반응을 예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책 따위 아무도 읽지 않고, 인기도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페이퍼팝이라는 곳에 종이 서재를 주문했고 아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여러 가지 공간 기획을 시도했지만 어딘지 엇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순서가 있고 달궈질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내 콘셉트를 이해하고 뜨겁게 반응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내 멋대로 책을 소개해주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오히려 '관심 없는 n명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 아닐까?'라는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고나서부터였다. 그래, 모두를 위한 큰 프로젝트보다는 나에게 맞는 걸 하자. 리고 '싫어하면 어쩌지? 안 맞는 책이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은 집어치우자. 능한 것만 꿈꿀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 나와 잘 맞는 일이라고 느꼈다. 한 명 한 명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노트에 적으면서 수업 중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모습이나 생각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인터뷰의 모양을 갖췄다.


추천하는 일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큐레이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도서뿐 아니라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큐레이션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좋은 문장에 갈증을 느끼지만 책은 잘 읽지 않는 세대에게 다가가는 일은 사춘기 소녀와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무게를 지녔다. '어떤 책에 푹 빠져서었는가'와 '푹 빠져들도록 설명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그 책의 감동과 매력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어떤 추천은 '이미 알고 있는, 벌써 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이기도 했으므로 사람만큼이나 큐레이션의 세계는 다양한 동시에 당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연결은 디폴트값이 아니다.

혼란과 분열이 시작점이다.


언제나.






"나는 네 행복에 관심이 많지."

"고마워요, 선생님."



어떤 책은 어떤 사람을 닮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책을 닮았다. 책장이나 서가에 꽂힌 <한나 아렌트의 말>을 보다가 민혜가 떠오르거나, 재희를 만나 얘기하면 <랩걸>이나 <제인 에어>가 떠오르는 식이었다. 도서관식 분류를 넘나드는 일은 짜릿했다.


주로 읽는 책, 좋아하는 작가, 고민, 현재 독서량과 독서습관, 좋아하는 장르, 나눈 대화 등을 전부 메모한 후 책을 고른다. 그 책이 책의 주인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전한다. 처음에는 소개할 책이 무궁무진할 것 같았는데 열 권 정도 생각하자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스무 권 정도 더 늘리자. 메모를 바탕으로 큰 서점까지 나가서 소개할 만한 책을 찾아보았다. 경청 데이터와 메모 데이터를 모으는 일은 첫 번째로 중요하다. 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메모엔 경청 너머의 내용도 담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걸러내기.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한 책점 같은 딱 한 권이 될 때까지.


언제나 말하듯, 길은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속에서 질문하는 사람에게 있으므로. 누군가를 위한 단 하나의 질문, 단 하나의 책을 찾는 일은 나의 영원한 꿈, 재미있는 장래희망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책을 추천할 수 없고 책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추천할 수 없다. 나아가 '이 책은 이런 책이니 당신이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명확한 이유가 없으면 책을 추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처음으로 체험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요시다 씨를 끝까지 파고들며 어떤 책을 추천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다. 과연 요시다 씨는 무엇을 받아들였을까? 기뻤을까? [...] 이 재미의 정체는 무엇일까.


<만 권의 기억 데이터에서 너에게 어울리는 딱 한 권을 추천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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