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봉산면 삭힌 김치
가을에 피는 꽃만큼 김치의 종류는 많다. 배추와 무, 순무, 오이, 가지 등 재료에 따라 다르고 담그는 방법도, 맛도 다양하다. 그중 속이 꽉 찬 결구(結球) 배추를 반으로 갈라 소금에 잘 절이면 결 고운 배추의 노란빛은 더욱 선명해지고 맛도 아삭하니 달다.
필자의 어머니는 배추김치를 맛있게 담그시는데 그 모양이 예쁘고 얌전하다. 자고로 김치는 배춧잎 사이사이에 속을 채워 넣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김치 속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잎 매무새를 정갈하게 갖추어야 한다. 얌전하게 모양새를 잘 갖춘 김치 한 포기, 한 포기를 정성 들여 차곡차곡 항아리에 담고 뚜껑을 덮기 전에 우거지라고 하는 배춧잎 겉대를 잘 펼쳐 서 꾹꾹 누른다. 우거지는 김치의 맛을 지켜주는 수문장(守門將)이다. 우거지가 그 역할을 잘하면 배추김치의 맛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서인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1236년)>에서 배추를 뜻하는 숭(菘)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질병치료를 위한 처방전들을 엮은 것으로, 당시에는 배추를 약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추는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에 들어왔다. 조선시대부터는 배추로 김장을 하였는데 농가의 세시풍속을 노래한 <농가월령가(1843년)>의 시월령(十月令)에서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무 배추 캐어 들어 김장을 하오리다
앞내에 정히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김치 장아찌라
독 곁에 중도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싸 깊게 묻고..(중략)”
위의 노래를 살펴보면 김장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재료를 나열한 구절이 보인다. 여기서 고추가 김장의 재료로 사용된 것은 확인할 수 있으나 고춧가루를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김치가 있다. 조연원(여, 64세) 씨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가 어릴 적에는 배추의 모양이 지금과 달랐다고 한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결구배추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같은 배추가 아니었어유.
옛날에는 이렇게 노랗게 배추가 좋지도 않았어요.
잎이 다 퍼져서 허벌렁 했지.
그거 배 갈라서 소금 정범 점벙 해놨다가
냇물을 끌어다가
아버지가 수수깡을 엮어서 바람을 피해 얹어 놓지.
그리고 숭덩숭덩 쓸어서 고추가 귀하니까
절구에 콩콩 찍어서 드문드문 놓고 항아리에 삭히는 거야.
그러다가 골마지가 앉으면 위에 거는 버무려서 지져먹고,
속에 김치는 꺼내 먹고 그런 식이었지.
이런 산골짜기까지 고추가 오기도 힘들었을 거야.”
항아리에 담가 둔 김치가 익어갈 때면 그 위로 골마지(김치나 장류 등이 발효가 되면서 표면에 하얀 막처럼 생성되는 곰팡이 같은 물질)가 앉는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것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지져먹었는데 그 맛이 전통이 되어 이 지역의 대표 음식이 되었다.
김형애(여, 63세) 씨가 운영하는 토담골은 마을 사람들이 해 먹던 삭힌 김치를 주요 메뉴로 한다. 그녀가 십 이년 전 귀농을 했을 때 삭힌 김치 맛에 반하여 향토음식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지금은 삭힌 김치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녀에겐 봉산면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삭힌 김치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김치예요.
1979년 삽교천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구만리 포구에서 새우젓을 사다 썼대요.
배추는 김치 담그듯이 소금에 절여서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야 잘 삭아요.
그래서 금이 간 항아리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물이 서서히 빠져야 하거든요.
재료는 소금에 절인 배추와 생강, 파, 마늘, 새우젓을 넣고
버무리면 되는데 3개월이 지나야 이 맛이 나요.
겨울에 서리 내리기 전에 버무려서
이듬해 4월부터 먹기 시작하죠.”
보통의 항아리로는 삭힌 김치를 만들 수가 없다. 반드시 금이 간 깨진 항아리여야만 한다. 금이 간 사이로 3개월 동안 배추의 수분이 빠진 후 뚜껑을 열면 삭은 김치의 우거지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잘 삭았다는 의미이다.
젓국에 삭은 김치는 먼저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자작자작 지진다. 그러면 비린 냄새가 줄어들고 거센 우거지가 부드럽게 풀리면서 맛이 구수해진다. 죽죽 찢어서 밥을 싸 먹어보자.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다.
음식은 지역의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그 독창성을 지닌다. 따라서 다양한 식재료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지역음식들이 있다. 그러고 보니 농가월령가에서 노래하던 김장이 ‘삭힌 김치’ 담그는 것과 유사하다. 그 시대의 그 맛이 이러하였을까? 조상들의 지혜가 곳곳에 남아있는 예산을 돌아보며 흐뭇한 웃음이 난다.
[도움 주신 분]
귀농 십이 년째인 토담골의 김형애(여, 63세) 씨는 삭힌 김치가 ‘맛의 방주(국제기구인 ‘슬로푸드 국제본부’가 진행하는 전통 음식과 문화 보존 프로젝트)’에 등재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다.
* 위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지역N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