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갑자기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초의 개운 행사처럼. 돌아다니면 안 좋은 것들도 다 털어내고 올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어디든 상관없었지만 마음을 보태고 보태다 보니 제주도행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저렴한 비행기표를 알아보다가 하마터면 요가하러 갈 시간마저 놓칠 뻔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좋아하는 자극 점이 점점 고비용으로 올라가고 있다. 둘째 친구는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작년 겨울 방학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전시회도 보여주고 했더니 첫째가 말하길 친구들은 해외여행 가는 아이들도 은근히 많다고.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덜컥 무언가가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미니멀한 삶을 일깨워 주고 싶던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국내지만 비행기 타는 여행을 시켜주고 싶었다.
평일 저녁에 가서 주말 전에 돌아오는 완벽한 일정을 잡았다. 가장 저렴할 때의 비행기표를 저가 항공으로 알아보았다. 다행히 첫째가 어린이로 끊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올해까지다. 다섯 식구의 비행기표 비용만 해도 여행경비를 꽤 차지한다. 한 가지 숙소를 잡아 여행 내내 묵는 것으로 예약을 했다. 표를 끊던 그날 밤 나는 꼼꼼히 일정을 체크해야만 했는데. 여행이 끝나던 날에 그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입장료를 끊고 체험하는 곳들은 가급적 가지 않았다. 꼭 보고 싶었던 전시회만 돈을 지불해서라도 봐야 했기에 가보았고 그 외에 가본 곳들은 사찰이라든가 시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곳들이었기에 노는 것에는 큰돈이 들지는 않았다. 여행 중 하루는 우도에 가보았다. 땅콩이 유명한 우도는 작은 시골 마을 섬이었는데 나고 자란 땅에 죽어서도 뿌리를 내린 무덤이 곳곳에 있었다. 동물이 파헤치지 말라고 둘레에 돌을 쌓은 무덤이 밭 한가운데에서, 집 앞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걸어서 천천히 돌면 좋으련만. 걷기에는 너무 넓었고 오토바이 같은 삼륜차와 관광버스, 전기차들이 지나다니느라 불편하기도 했다. 결국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보는데 이걸 안 탔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버스를 타고 돌며 듣는 기사님의 입담은 우도 여행의 핵심이다.
송당리 마을도 걸어보고 동문재래시장에도 걸어서 가보며 제주도 안의 동네들을 구경했다. 하천 옆의 오래된 단독 집. 계단을 올라 오로지 자신만의 현관을 가질 수 있는 집. 옛날 집들은 구조가 특이하고 서로 같은 듯 다르다. 온갖 오름으로 이루어진 제주도는 동네 안에도 오르막길이 많았다. 길에서 본 고양이들은 태초의 조상이 배를 몰래 타고 건너왔을지 설마 수영을 하며 떠내려와 용감하게 개척했을지 살게 된 시초가 궁금했다. 상상과는 다르게 그들의 표정은 나른했지만.
마지막 날 체크인 시간도 되기 전부터 공항에 도착했다. 한 시간을 기다려 체크인을 하러 가니 날짜가 한 달 뒤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 한 달 살기란 어떨까 생각해보았지만 이런 상황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당일 출발할 수 있는 다른 비행기란 없었다. 역시 제주도는 섬이었고 집은 멀고도 멀다. 다음 날 표로 끊고 하루치 차 렌트를 다시 하고, 묵었던 숙소에 연락을 해 하룻밤을 더 묵었다. 원하는 시간에 집을 못 간다 하니 아이들도 나도 갑자기 집이 더욱 그리워졌다.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보려고 택한 여행길인데. 여행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일부러 잠시 떠나보는 핑계 인지도 모른다.
진짜 마지막이 된 하루는 협재해변에서 보냈다. 우도에서 보았던 푸른 바다만큼이나 아니, 더욱 파랬던 바다. 조개가 부서진 하얀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곳. 여름이 되면 다시 제주에 와 이 해변에서만 며칠 보내다 가도 될 것만 같았다. 검은 돌과 새파란 바다의 색 조합을 보면서 이래서 제주에 오지 싶었다. 무얼 만들지 계획은 없지만 해변의 조개껍질을 몇 개 주워왔다.
집으로 가는 길은 떠날 때만큼이나 신이 났다. 다시 일상이 살림과 세끼 밥을 하는 내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만. 생각보다 길었던 여행이, 잘못 끊은 표가 지루했던 내 삶을 감사하게 만들어주었다. 익숙한 자리에 지내는 것이 사실은 가장 큰 행복이었단 걸 알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