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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며화려한 Sep 07. 2019

밭 이야기

일구는 생활

 올해 나의 텃밭은 화려하게 시작했다.

 씨앗이라는 건 그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 엄청난 힘이 있었고 밭의 맨 앞줄부터 빽빽하게 돋아났다.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텃밭 성적표에는 이제 작물을 주변과 나누어먹으며 도시 농부로서의 즐거움을 누려보라고 빠른 수확에 대한 독촉이 적혀있었고 가끔 4점을 기록하기도 했었다. 몇 점이 만점일지는 모르나 나의 마음은 5점일 거라고 멋대로 기준을 정하고 있었다.

 여름까지도 나는 제법 부지런했다. 더위를 무릅쓰고 지나는 길에 한 번씩 들렀으며 잊지 않고 물을 공급해주었다. 덕분에 상추는 시댁과 친정에 나누어드리고도 넘쳐났고 급기야 나누어 줄 새로운 대상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버리는 것들도 많아서 아직도 상추를 돈주고 사먹을 때는 죄책감을 느낀다. 먹을 수 있는 양을 훨씬 벗어났지만 다섯 평 땅 안의 가득함은 언제고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지치지 않는 부지런함에 제동을 거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오전 친구와 요가를 마치고 밭에 갔던 날이었다. 정신없이 상추를 뜯다가 갑자기 숨이 답답해져 왔다. 그것은 명치의 아픔도 아니고 복통도 아니었다. 잠시 허리를 펴기 위해 일어나 보았더니 온 세상이 붕붕거리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혹시 하는 생각에 나는 바닥에 누웠다. 다리를 올리고 숨을 크게 쉬어보았다. 말을 하지만 입이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이었고 말투는 점점 늘어지고 무기력해졌다.

 심장으로 가는 혈류의 공급을 늘어나게 하려는 시도보다는 친구가 가져다준 토마토 한 알이 응급처치가 되었다. 놀랍게도 두 알을 먹고 백리 바깥처럼 느껴지는 주차장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해서 집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구급차를 타고 돌아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 날 이후 나는 외출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장마가 지난 밭은 밀림이 되었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설거지를 하면서 혼자의 생각에 잠길 때도 밭에 가보아야 한다는 걱정은 잠시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작물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들이 지나갈 길을 터주기 위해서라도 밭을 손보아야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나는 큰 맘을 먹고 밭을 한 번 방문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모를 응급상황을 대비해 해가 진 저녁에 밭을 가는 것을 택했다. 입추가 지난 날씨는 해가 급하게 저물기 시작했다. 노을의 끝물을 보며 차를 세웠는데 잡초를 뽑으러 들어가니 이미 어둠이 밀려왔다. 땅거미가 지는 밭의 주인은 모기들이다. 자신들의 서식지에 제 발로 들어온 일용한 양식에 모기떼들이 들러붙었다. 같이 간 아들은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혼자 밭에 들어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잡초를 뽑았다. 다행히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했던 터라 호미가 없이도 잘 뽑혔다. 대충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팔다리의 따끔거림에 집중하기에는 밭을 손보기에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가을을 준비하는 나의 텃밭은 다시 봄처럼 시작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른 작물들과 기둥이 올라온 상추들을 뽑아내어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랑의 모양이 바뀌고 어떤 것이 심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밭은 휴식의 기간을 보내고 있다. 일 년이 채 가지 않고도 시작과 끝, 또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화려한 시절만 살 것 같아도 텅 비어야 하는 때가 온다. 아무것도 없어 보여야 무성 해지는 시절도 온다. 내가 살아가는 길목에도 무엇을 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자라 보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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