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없던 삼 일간은 의외로 호젓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남편의 부재가 홀가분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시간을 조금은 내 마음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틈이 생겼고 작은 변화에서 잠시 동안 기쁨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른 아침에 온 집안 불을 다 켜놓고 아이들을 깨운후에 다들 학교로 떠나면 찾아오는 적막감 같은 것. 창문을 다 열고 청소기를 열심히 돌릴 수 있는 것 따위의 작은 사사로움들 말이다. 남편은 기상시간이 늦어 배려 차원에서 하지 못했던 행동들.
아빠가 여행을 떠났으니 우리끼리 외식이라도 해보자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갔다. 주말이 끝나가는 저녁의 쇼핑몰은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둘째가 먹고 싶다는 식당으로 들어서 주문을 하고 앉아있는데 등 뒤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추측하건대 이십 대 후반의 연인인 듯했다.
-결혼은 해도 불행하고 안 해도 불행한 것 같아.
다둥이를 데리고 온 아줌마는 그 순간 자기를 보며 한 이야기인가 싶어 괜히 뜨끔한다. 물론 아이들 셋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장면이 괜스레 결혼의 아이콘이 될리는 없지만 혹시나 모르는 그녀의 의식의 흐름이 나를 보며 결혼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결혼 선배로서 '안 해도 불행'쪽으로 생각이 기울도록 가급적 화목하고 평안한 저녁식사 모습을 연출해주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스트레스를 쌓아가면서 왜 타인의 결혼은 지지해주고 싶은 건지.
나의 결혼생활의 단점은 남편 말대로 '그대도 나도 아닌 다른 이유로 아파'해야 했었던 많은 날들이었다. 그 노래 가사의 일부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남편은 놀라워했었다. 우리의 밝히지 못한 고통의 중심에는 시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남편 뒤에 숨지 못했고 아버님은 그것을 간파하시는 분이었다. 숨으려 하면 끌어내고. 그것은 '너네가 이물 없이 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사람을 편하게 대하고 상대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 좋은 방법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결혼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보다는 잘 대처하겠지 싶은 생각에서 일까.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고쳐나가야 하는 것 투성이이지만 불편함을 동반한 행복임에는 틀림없다. 쓴맛 뒤에는 예상치 못했던 단맛도 있기 때문에.
인생이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라면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우리는 일정량의 고통을 안고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생을 배팅한 나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길고 유동적이다. 힘든 부분의 한고비를 넘으면 분명 성장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들이 쌓이면 예전보다는 성숙해진 자신을 돌아보는 날도 온다. 결혼. 해도 불행 안 해도 불행일까. 안 해도 불행이라면 일단 부딪혀보길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