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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남우 Sep 16. 2021

사슴 같은 눈망울

뿔이 잘리고 자라기를 반복하기까지

  양이 보고 싶어서 간 제주양떼목장엔 사슴이 있었다. 난 내가 실제로 사슴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난 그렇게 뿔 달린 거대한 동물을 본 적이 없다. 그 압도적인 크기 때문인지 큰 나뭇가지를 닮은 뿔 때문인지 아니면 눈망울 때문인지, 사슴은 신성하다는 말과 어울렸다. 사슴의 눈을 가만히 들여보다 사슴과 나 사이에 놓인 창살에 숙연해졌다. 


'제주양떼목장'에 있는 사슴

   

   사슴의 눈에서 뿔로 시선을 옮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뿔이 나지 않는 염소들이 생각났다. 뿔의 공격성을 우려한 농장 주인들이 아기 때부터 뿔을 태워버려 엄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뿔만 남아있는 염소들. 같은 인간으로서 이 지구에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음에 죄책감이 든다. 뿔이 있어야 할 동물이 뿔이 없는 건 입 없는 사람과도 같다. 어쩌면 날카로운 뿔보다 입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피가 훨씬 흥건할지도 모른다. 휘두름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상처로 이어지는 뿔에 비해 사람의 입이 지닌 공격성과 그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예술로 전하는 메세지

   

    녹용 소비자들은 뿔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잘라주는 게 맞다고 합리화한다. 녹용은 새로 돋은 사슴의 연한 뿔을 채취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사슴이 통증을 느낀다[1]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제는 마취 주사를 놓으며까지 뿔을 자른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된 거 아니냐고 되받아친다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속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을 빌려 논점을 다시 짚어주고 싶다.  이득을 위해 태생의 상징을 없애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지독한 발상이다. 왜 인그 염소들은 자신에게 뿔이 없는 줄도 모르고 어떤 물체를 향해 뛰어올라 뿔로 박는 시늉을 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면서 정작 본인들은 오래 살고 싶어하는 걸까. 왜 동물에게 결함을 만드는 걸 아무렇지 않아할까.   


   녹용을 '복용'한다는 말도 틀렸다. '복용'은 '약을 먹는 행위'를 말하는데, 녹용을 먹고 건강에 효과를 본 인간들이 이를 약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 잔인한 언어가 시작이었다. ‘약’으로 규정된 순간 녹용은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녹용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던 중 그 잔인성을 마구 폭로하는 한 기사를 보았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한숨에 나왔다.     

  ‘적정량만 복용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자!‘


   인간-동물 구조에 관한 글을 쓸 때면 항상 ‘내게 동물들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었다면’이라는 바램으로 끝난다. 내가 간절하게 알고 싶은 건 그 울타리 안에서도 사슴이 행복한지, 당근이 네게 힘이 되는지이다.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사슴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당근을 주는 일뿐이었고, 아무도 그 뿔에 손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사슴 같은 눈망울’은 예쁜 눈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눈동자가 거울이 되어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눈이었다. 제주양떼목장에서 사슴의 눈을 보고 느꼈던 숙연함은 인간의 잔인한 욕심을 겨냥하는 나의 죄책감이었다. 만일 제주양떼목장 주인분이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사슴은 잘 있는지, 뿔은 잘 있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1] 호수사슴산업협회(Deer industry association of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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