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 피는 꽃

진정한 위로는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데 있다.

by 돋을볕

20211207

<절망 속에 피는 꽃>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_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詩作 메모 중에서



강의를 듣고 오면 알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사람들과의 교제도 즐거웠고 유용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다음 날이면 절망에 빠진다. 그 밑바닥의 구멍은 무엇일까? 단순히 내면으로 집약되는 에너지 탓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나를 잡아당기는 이 피로는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작은 잡지를 발견했다. 청소년을 위한 잡지였다. 잡지의 신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나는 체념을 맛보았다. 이미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모의고사를 치면서 거의 대부분은 진로가 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 어렴풋한 윤곽이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거짓말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일까, 쓴웃음이 났다. 속고 싶었는데 속아지지 않아서 슬펐다.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 성공이야기는 인공조미료 냄새가 난다. 정말 사람 몸에 무해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너무 거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나 앞길이 창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어쩐지 배우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어쩌면 그 사람이 이룬 성과는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도 그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의 이야기처럼,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려온다. 강의 이후 느끼는 감정은 이것과는 다른 것이다. 현실에 뿌리 박히고 따스하며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온다.



강의에 다녀오는 게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피곤해서일지도 모른다. 꽉 막히는 퇴근길, 서울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며 운전을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운전에 영 소질이 없는 나에게는 더욱 곤혹스러운 일이다. 평소에도 웬만하면 운전을 잘하지 않는 데다가, 퇴근길 심지어 서울에서의 운전은 처음이다. 두 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하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문제다. 혼자서 사유하는 시간. 아무도 방해하는 이 없고, 현실감각을 잊게 만드는 까만 밤과 닫혀있는 좁은 공간. 느릿느릿 행진하는 앞 차의 붉은 브레이크등 밖에 보이지 않는 그 긴 시간.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_이상, <오감도 시제1호>



불안을 견딘다. 내 안의 구멍들을 마주한다.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들이다. 감추려 해도 덮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쓴맛이 나는 기억들을 되새김질해서 씹고 또 씹는다. 부정할 수 없는 내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한다. 욕망할수록 절망한다.


절망 속에서 나는 타자가 된다.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입체적 인물이 된다. 사유하며 부서진다. 생각보다 더 형편없이 살아온 것 같다. 쓸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 속에 한 줌의 고운 모래가 된다. 주먹을 쥐면 모이고, 손바닥을 벌리면 달아나는 모래알. 모래알 속에 수많은 사연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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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말했다.

“잘 모르겠어. 다이아몬드가 큰 위로가 돼줄 것 같은데.”

앤은 말했다.

“나는 나 자신 이외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평생 동안 다이아몬드로 위로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만족해. 매슈 아저씨가 사랑을 듬뿍 담아 내게 준 이 진주 목걸이가 분홍 드레스 부인의 보석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거든.”

_루시 M.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쓰는 게 나의 일이라 생각하고 쓴다. 괴로움도 글을 쓰는 일이다. 진정한 위로는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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