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유년시절의 한 조각
2021.8.16
잘 익은 자줏빛 스쿠터 한 대가 농로 위를 달려간다. 아빠는 의자 위에, 나는 작은 다용도 함 위에 앉아서 백미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 논에는 벼들이 생글생글 초록 잎들을 뽐내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자두나무가 한가득이다. 자두나무 밑에는 파란 비닐로 된 천이 기다랗게 주욱 깔려있고, 잘 익은 자두가 그 위로 뚝뚝 떨어진다. 달콤한 자두 냄새, 아빠의 시큼한 땀 냄새, 아빠의 양 볼을 따라 흐르는 내 머리카락. 빨간색을 좋아하는 나는 온통 빨간색으로 치장했다. 빨간 슬리퍼와 진달래색 쫄바지, 둥근 카라가 달린 빨간색 티를 입고 소나무의 초록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덜컹덜컹 흙길을 따라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우리 00~ 스톰~톰톰톰톰~ 스톰~”
“우리 아빠~ 아빠~빠빠빠빠~ 압빠~”
아빠의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오면 맞은편 산에서 메아리칠 정도로 더 큰 소리로 대답한다. 아빠의 화통한 웃음소리에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있지도 않은 노래, 처음 부르는 노래를 왁자지껄 큰 소리로 불러댄다.
엄마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자두나무 아래에서 밭에서 갓 따온 뜨끈한 수박을 먹는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돌멩이 위에 걸터앉고, 큰언니는 사각사각 엄마가 수박 자르는 모습을 보고 있다. 작은언니는 얼마 전 태어난 백구 강아지를 하염없이 쓰다듬고, 나는 풀을 뜯는 흑염소에게 수박 껍질을 던져준다. 수박을 다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자두를 주워 상자에 담는다. 할아버지는 긴 장대로 자두를 톡톡 건들고, 언니들은 자두를 주워서 바구니에 담고, 엄마는 자두를 크기별로 선별해 상자에 담는다. 아빠는 상자를 옮기고,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 언니들의 눈을 피해 크고 윤기 나는 자두만 골라서 주워 먹는다. 끈적한 과즙이 목을 타고 흘러 내려와 옷을 적시고, 팔을 따라 내려와 팔꿈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사계절 다른 나무와 각기 다른 열매들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집 앞마당에는 빨간색과 노란색 튤립 옆으로 커다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고 뒷산에는 앵두나무와 모과나무, 대나무가 우리를 감싼다. 소와 흑염소, 닭들이 있는 산에는 자두나무, 밤나무, 사과나무, 매실나무, 뽕나무, 옻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층층나무, 보리수나무, 백일홍 나무, 아카시아가 가득하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뽕나무이다. 스쿠터를 타고 도착한 곳에는 아주 커다랗고 듬직한 오디나무가 벼랑 끝에 서 있다. 검보라색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서 관대한 자태로 두 팔을 우직하게 벌려 우리를 품에 안아준다. 시원한 그늘 밑에 서서 두 눈을 말똥거린다.
“여기서 이거 들고 있어 봐. 아빠가 맛있는 거 따줄게.”
아빠는 쓰고 있던 하얀색 모자를 벗어 건넨다. 두 손에 땀을 쥐고 아빠가 뽕나무를 밟고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빠의 발이 잎사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내 웃옷 아랫부분을 동그랗게 벌려 오디를 품에 가득 담아온 아빠는 내가 들고 있던 모자 위에 우수수 쏟아 준다. 나는 오디 열매를 쪽쪽 빨며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빠의 흰 모자가 검보라색으로 물들고 내 입과 손끝도 덩달아 까마귀 친구가 된다.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나 빼고 가족 모두가 바쁘다. 엄마, 아빠는 아직도 자고 있는 내게 껄껄 웃으며 다가와 내 팔과 다리를 위아래에서 쭉쭉 잡아당긴다. “쭉쭉 커져라~ 하늘까지 닿아라~” 배꼽 빠지는 주술을 외우며 깨운다. 엄마가 만들어 준 당근 주스를 마시고 부엌으로 가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익숙한 콩나물국 냄새가 위장까지 훅 들어온다. 엄마는 김밥 말고, 할머니는 유부초밥 싸고, 아빠는 과일을 깎고, 할아버지는 용돈을 주신다. 아빠의 트럭을 타고 학교에 간다.
“야, 00네 아빠 차인표 닮았어. 00야 너 아침에 몇 시에 학교 와?”
아빠 팬클럽도 있었는데 트럭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친구들이 나와 기다렸다. 덩달아 내 어깨도 으쓱해져서 아빠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면 아빠는 왼손은 창틀에 올리고, 오른손을 창문 바깥까지 빼내서 더 크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차인표처럼 길쭉한 주름살이 아빠의 이마와 입가에 번졌다.
생일이면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에 아빠가 사 온 흰 케이크 상자와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풍선이 놓여있었다. 틈만 나면 책 선물을 해주셨는데 <사랑을 나르는 수다쟁이 천사>, <수정구슬의 비밀> 같은 제목의 책들이었다. 책 사이에 꽂혀있던 깜짝 사탕 같은 아빠의 편지가 내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엄마에게 혼나서 방에 틀어박혀 눈물 콧물 빼고 단식 투쟁하고 있으면 아빠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마음의 실타래를 모두 풀어주셨다. 나에게 행복은 아빠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