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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Sep 01. 2022

댓 고개 마을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골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적어본다.

댓 고개 마을


초고 2022.09.01.     

     



봄이면 할머니들이 쑥을 캐러 가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너구리가 닭을 잡아먹는 동네. 산 아래 밭에 심어놓은 고구마 모종을 두더지가 파먹고 간신히 돋아난 줄기는 고라니가 씹어 먹는 산 아래 댓 고개. 예부터 대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 언덕 위 시골교회와 종탑. 방앗간을 하던 몸이 마르고 왜소한 할아버지는 정각마다 종탑에 올라 땡그렁 땡 종을 울렸다. 교회 아래 할머니는 목소리가 아주 컸다. 그 집 높은 담벼락 위에는 뾰족한 유리가 다닥다닥 박혀있었는데, 어떤 도둑 일지 몰라도 그 담을 뛰어넘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말라는 무시무시한 엄포가 둘러쳐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교회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이 담벼락 옆에 붙으면 호되게 호통을 치셨다. 하루 종일 노는 게 일상이던 그때, 나도 해가 지도록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놀았다. 그 할머니 댁 마당에 숨바꼭질하러 들어갔다가 욕이란 걸 처음 들어봤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가택침입이라 해도 꼼짝 못 할 일인데 당시에는 워낙 3대 이상이 알던 사이가 모여 사는 시골 동네라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아 개념이 없던 때였다. 하지만 가끔 어른들의 손을 붙잡고 집에 들르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과자를 하나씩 쥐여 주셨다. 나는 가끔이었지만 늘 그 집에 머물며 간식을 얻어먹는 아이가 있었다. 신체와 정신이 부자유했던 남자아이는 그 할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눌한 말투에 옷차림도 꾀죄죄하고 가족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교회 아랫집 할머니는 마치 친할머니라도 되는 듯이 그 아이를 불러 온갖 음식을 내주셨다. 그 아이는 심지어 우리 동네도 아니고 저 멀리 족히 어린아이의 걸음으로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교회까지 매일 같이 찾아왔고 그 할머니 댁에 들렀다.    

 

  어릴 , 엄마가 부침개라도 부치면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한가득 담아 들고     심부름 가느라 발에 불이 났다. 옆집 주희네, 윗집 정건네, 언덕 맞은편 포도 할머니네,  뒤편 김치 할머니네……. 돌아올 때면 소쿠리에 포도, 김치, 호박 따위를 가득 받아서 “엄마, 할머니가  먹겠다고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요!” 외치며 낑낑대며 들고 와야 했다. 엄마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그래. 잘했어하고 웃으셨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엄마는 누구보다도 손이 커서 음식을 한번 했다 하면 동네잔치 수준이었다.  음식들을 나르던 나는 덕분에 미쁨을 듬뿍 받았다.     



  길가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잘 모르는 얼굴이어도 무조건 인사했다. 하우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버스에서 내려 처음 보는 분에게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랴. 네가 누구냐? 너네 할아버지 성함이 뭐여?” “진 대자 선자예요.” “잉. 그려. 댓 고개 갑수네 손녀 구만.(갑수는 우리 할아버지 어릴 적 불리던 이름이다) 누구 딸이냐?” “진 이장네 셋째 딸이에요.” “잉. 네가 진 이장 딸이구만. 그려. 안부 전해드려라잉?” 아빠는 12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장을 해오셨고, 나는 이름보다 ‘인사 박사’ 혹은 ‘진 이장네 셋째 딸’로 통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사용하던 사투리가 있었는데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거의 다 잃어버렸다. 고향 집에 오면 사용하는 사투리들이 참 정겨우면서도 밖에서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사투리는 표준어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표준어’라는 게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배우는 순간부터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했다. 그탓에 잃어버린 소중한 우리말이 너무나 많다. 이제와 다시 우리말을 찾고 공부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언급하려 노력하지만 그때의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이 덜하다.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부모님이 집을 비워주셨고 마당에 불을 피우고 각종 고기를 사다 주셨다. 아기 공룡 둘리에 나오는 고희동을 닮아서 ‘희동이’로 불리던 서울 친구는 생긴 것과 다르게 뼛속까지 도시인이었다. 작은 기차역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기까지 희동이는 몇 번이나 혀를 끌끌 찼다. 시골 아스팔트 길에 발을 내딛는 것도 어색해하더니 버스가 번호가 아니라 동네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은 시골 버스도 번호가 생겼지만 당시에는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동네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희동이가 사람들이 혹시 어디에서 나눠준 모자 쓰고 다니는 거 아니냐면서 웃었다. 나는 더 크게 웃고 말았다. 나중에 버스를 타고서 희동이도 알게 되었지만 버스에 앉아계신 어르신들 대부분이 ‘xx농약’이나 ‘oo종묘사’ 등의 글씨가 쓰인 모자를 쓰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내 고향에 대해 희동이처럼 꺼려하는 사람보다는 한 번쯤 와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희동이와 같이 왔던 친구들은 이런 시골에 연고가 있다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나 또한 누가 뭐래도 꿈결 같은 이 동네가 참 좋다. 희동이는 절대로 알지 못할 자연의 숨결을 나는 알고 있다. 글이 절로 나오고 시간이 멈추고 모든 허울이 사라지는 곳이다.


  계절에 따라 빳빳한 초록 벼와 노란 황금벼가 물결치고, 각종 열매와 풀벌레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집마다 트랙터와 경운기가 각기 다른 엔진음을 내고 작은 강아지  마리도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정지용의 <향수>처럼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 “전설바다에 춤추는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이다. 여전히 부모님이 시골에 계시다. 종종 내려가지만 부모님도 연세가 드셨고 동네 가구 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안식처이다.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골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적어본다.     


<지금도 손이 큰 우리 엄마. 내가 손이 큰 건 엄마를 닮은 걸까? 이렇게 가마솥에 한가득 몇 번을 삶았는데 다 나눠주느라 엄마는 고작 2개를 드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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