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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Feb 28. 2023

인생의 파도를 함께 넘는 서퍼

사랑에 성공이란 게 있을까

<인생의 파도를 함께 넘는 서퍼>


  남편이 희망퇴직 여부를 좀 더 고민해 보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그 몇 시간이 합격자 대기 발표를 기다리는 취준생처럼 떨려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은 백 번도 넘게 딴 세상에 가서 차려지지 않는데 아이들을 위해 계속 몸을 움직였다. 아이들 점심을 챙겨주는데 드디어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걱정이 가득인 내 마음을 모르고 신이 난 목소리다.


  "나 결정했어. 그만두려고. 지금 가서 그만둔다고 말할 거야.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해 보고 물어봤는데 다 다르게 말하더라고. 근데 여기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대로 하라고 해줘서 고마워. 그만둔다고 말하고 올게."


  남편의 목소리와 반대로 나는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남편을 믿어 준다고 했으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는 내가 미웠다. 미국의 유명 드라마인 <위기의 주부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편이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가슴이 뛰는 일을 찾겠다는 말에 아내는 고민 끝에 그 꿈을 응원해 주기로 한다. 그러나 남편이 동네에 피자 가게를 열겠다고 하자 현실적이고 지적인 아내는 좌절한다. 피자 가게를 반대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반문한다.


"내 꿈을 응원한다면서?"


아내는 자신을 돌아보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내 실수였어. 응원할 만한 꿈인 줄 알았지. 내가 나쁜 아내였어."


그러자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위로한다.

"아냐, 무모한 짓을 하는 날 보호하려던 거잖아."


아내는 남편의 위로에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위험을 피하는 남편은 어떤 아내든 응원할 수 있어. 난 그런 남편은 싫어. 게다가 그런 아내는 더욱더 되기 싫어. 그러니 피자 가게 열어. 성공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불행히도 피자 가게는 망하지만, 부부의 사이는 신뢰가 돈독해진다. 나는 피자 가게가 망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남편을 응원할 수 있을까? 이미 그렇게 말한 나는 거짓말쟁이일까? 사실은 남편이 그만두지 않기를 바라면서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닐까? 팽팽한 두 마음이 줄다리기를 했다. 그리고 재취업과 아이 양육, 글쓰기 사이에서 무조건 재취업이라는 카드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 상황일 때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 나의 본성은 '성취'와 '인정'이다. 아이 양육에는 없는 그것들을 나의 노력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로 돌려받고 싶었다. 아이들을 돌보며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보호자로만 살아왔던 시간들을 통해 내적 성장을 많이 이루었다. 괴로움을 통해 생각과 마음을 넓혔다. 그러나 다시 위기 상황이 오자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발버둥 쳤다. 역시 남편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싹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만둬도 된다던 내가, 막상 남편이 진짜 그만두겠다고 하자 얼른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날이 검기울자 남편이 퇴근했다. 멋지게 사표를 날리고 속시원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얼굴이 젖어서 왔다. 

"막상 그만둔다고 말하려니까 나도 너무 두렵더라. 네 말대로 당장 나가면 뭐 하나 싶기도 하고. 희망퇴직자라는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냥 다 그만두고 싶었는데 애들 생각도 나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네가 일을 하는 것도 싫고, 어쨌든 내가 우리 가족은 다 책임질 거야. 희망퇴직 안 하고 계속 일하기로 했어."


  남편이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다시 자신의 책상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된 마음이 있었을까. 자존심과 감정을 다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가장의 책무를 생각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다 알 수 없을 그 고통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끔찍했을까. 남편을 온전히 믿어주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를 위해서 힘든 결단 해줘서 고마워. 대신 이 아파트도, 동네도, 그 외에 어떤 것이든 오빠가 마음 편한 대로 하자. 대출이 부담되면 다른 데로 이사 가도 좋아. 오빠가 집에 와서는 편안하고 위안을 얻도록 나도 최선을 다할게."


  남편은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가족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한 건지도 모른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 묵힌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도 여전히 서로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남편은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많은 고민을 하고 나와 다른 형태의 고통을 느끼고 분출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이야기해 주는 그 말들이 고마웠다. 남편은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줄 줄 알았다면 진작 얘기할 걸 하면서 후련해했다. 나도 남편에게 나의 스케줄표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기다려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우린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나 또한 남편을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었다. 결혼식을 기점으로, 이미 한 배를 탄 가족이고 희생과 헌신을 기쁨으로 하기로 약속한 관계다. 


  BTS의 가사에 나태주 시인의 산문을 더한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하기는 말야, 사랑에 성공이란 게 있을까.

다만 어디까지 가다가 멈추는 게 사랑 아닐까.

언제나 불완전하고 미완으로 끝나기 마련인 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언제나 서툴고 모자란 것이 사랑이 아닐까."


  남편은 다시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직장을 다니는 이상 언제나 퇴직의 위협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언제 또 남편을 옥죄고 불안감을 느낄지 모른다. 이번에 넘은 희망퇴직이라는 파도는 인생에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가다가 멈출 때도 많다. 언제나 불완전하고 미완으로 끝난다. 서툴고 모자라다. 그러나 파도를 하나 둘 넘을 때마다 우리는 조금 더 훌륭한 서퍼로 자라 간다. 아이들을 지키는 보호자로, 가족을 지키는 수호자로, 또 다른 파도를 넘길 동역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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