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속이 있을 때 대부분 일찍 나선다. 약속시간이 다가와 허겁지겁 나가는 것도 싫지만 여유를 가지고 나서면서 경험하는 뜻밖의 모습들을 좋아한다.
얼마 전 서울에서 모임이 있었다. 도착 예상시간보다 1시간 더 일찍 나섰다. 급하지 않게 준비하고 나서는 순간들을 음미한다.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일부러 속도를 줄인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급하게 걸어 올라가지 않고 서서 주변을 돌아본다. 환승할 땐 천천히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걷는다.
목적지만 생각하며 급히 움직이면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손자의 아이언맨 가방을 대신 맨 할아버지의 느릿한 걸음과 재촉하는 손자의 날아갈 듯 한 발걸음, 이어폰을 끼고 발을 까딱거리면서 음악을 듣는 아가씨의 흥겨움,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다른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다른 지하철로 환승하는 길목에서도 천천히 걷는다. 꽤 긴 환승거리 사이에서 많은 것들이 보인다. 연예인을 응원하는 전광판,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은 팬의 모습도 보인다. 지역 여행을 독려하는 광고와 저 멀리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소리에 나를 스쳐 뛰어가는 사람들. 쓸려가는 사람들 뒤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이미 출발한 지하철 문 앞에선 한차례 소동이 지나가 잠잠한 상태였다.
지하철 안에서의 모습은 한결같다.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는 사람, 이어폰으로 무언가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은 사람들. 그러다 순간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갑자기 아래를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한강이다. 한강 철교를 건너면서 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한강과 붉은 노을의 빛을 보는 순간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함께 본다. 강을 건너면 전철은 다시 지하로 들어가고 사람들의 고개가 아래로 다시 떨어진다.
빠르게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TV의 장면처럼 순간 화면이 느리게 변한다. 긴 꼬리를 끌며 태양을 스쳐 지나가는 혜성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잔영이 물 흐르듯 느껴진다. 그 속에서 멈춰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낯설다. 같은 속도로 갈 때 느끼지 못한 새로움이 전해진다. 때론 시간을 거꾸로 써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때론 남과 다른 속도가 나를, 남을 더 잘 알게 한다. 같은 속도로 달리다 보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속도가 다르게 한다는 건 낯선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느리던 빠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