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Dec 11. 2023

누구에게나 있는 날

나는 화초를 잘 못 키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못 키운다. 아무렇게나 키워도 잘 자란다는 산세베리아나 선인장도 죽인 그야말로 마이너스의 손이다. 좋은 흙도 쓰고 영양제도 주지만 어느새 죽고 만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진딧물이 잔뜩 생겨 걷잡을 수 없이 많아져 말라죽은 경우도 있었다.


베란다에 상추, 고추도 키워도 보았지만 맛볼 새도 없이 다 죽고 말았다. 좋은 흙을 쓴다고 화원에서 부엽토도 샀다. 물도 충분히 잘 주었다. 하지만 키만 멀쑥하게 커버리고 드문드문 꽃만 작게 피다가 시들고 말았다.

“아파트여서 그럴 거야. 바깥에 키우면 잘 자랄걸?”

속상해하는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그러다 보니 밖에 나가서 들꽃이나 나무를 보는 것이 더 좋았다. 길 가다가 보도블록 사이에서 중대가리나 애기땅빈대를 볼 때마다 반가웠다. 작은 틈새에서 작은 잎들이 영역을 뻗어나가며 자라는 것을 보면 정말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 아파트 샛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주차장 옆 울타리를 넘어 하늘을 향해 뻗은 박주가리 덩굴이 보였다. 끝에는 샛노란 진딧물들이 가득했다. 줄기가 안 보일 정도로 노랗게 덮여 있었다. 괜히 몸이 근질거렸다. 그러다 예전에 진딧물로 죽은 화초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없애려고 노력해도 잘 안 없어지던 진딧물.


‘너희도 당하고 있었구나!’

키우는 화초나 채소에만 신경 쓴 나머지 이렇게 들꽃들도 시달리고 있다는 걸 전혀 생각하기 못했다. 진딧물이 사람들이 키우는 식물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우리는 화려한 화초를 보느라 들풀들도 진딧물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진딧물에 시달리는 내 화초만 안타깝다.

 

누군가의 화려함이나 행복한 일상을 볼 때 자신의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진다면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도 진딧물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뎠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를 진딧물 같은 고통이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또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할 때 누군가는 별 볼 일 없는 나의 일상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누구나 숨겨진 고민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든가를 생각하면 견디기가 너무 힘겨워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민들과 고통들을 안고 산다.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보이지 않는 힘듦을 인정하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금은 서로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측은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서로를 위로했으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박주가리 덩굴손처럼 그렇게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와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