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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Feb 03. 2024

셋째? 딸이라고?

행운처럼 온 너

 나는 딸이 셋이다. 큰 아이와 둘째는 2살 차이고 그 아래로 7살이 어린 막내가 있다. 여전히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경상도에 사는 사람과 결혼한 나는 첫째와 둘째 때도 아들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다가 어쩌다 셋째를 가지고 되었다. 시부모님은 내심 기대하셨고 성별을 알 수 있는 개월수가 되었을 때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말씀이 없어지셨다. 상처되는 이야기도 들었다. 첫째와 둘째는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름도 작명소 가서 지어오셨다. 하지만 막내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예민했던 시기, 힘들게 보낸 나는 뱃속의 셋째에게 너무 미안해서 많이도 울었다. 다행히 남편이 낳을 거라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선을 그었다. 받았던 스트레스만큼 아이가 작아 걱정했지만 다행히 중반기에 안정을 취할 수 있어 막내는 정상 체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막달이 되었다. 출산일을 앞두고 두 딸은 시댁으로 보내고 혼자 남았다. 남편은 겨울 동안 대전에 있는 대학에서 연수를 받아야 했다. 안 그래도 예정일이 1월이라 혹시라도 혼자 있을 때 진통이 올까 봐 걱정했다. 예정일이 지나고 막내는 나올 생각을 안 했고 너무 늦어질까 봐 나는 매일 두 시간씩 개천변을 걸었다.


아무도 없던 어느 새벽 4시, 문득 느껴진 통증으로 잠을 깼다. 진통이 시작되었구나. 나는 샤워를 하고 짐을 쌌다. 남편에게 문자도 했다. 다행히 다니던 산부인과가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병원으로 나서기 직전, 현관의 거울을 보았다. 배 위치가 한참 내려가 있어 정말 금방이라도 아기가 나올 것 같다. 나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만삭의 배를 드러내고 태어나기 전 막내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셀프 만삭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홀로 짐가방을 들고 6시에 산부인과로 갔다.



남편이 소식을 듣고 급히 올라오는 사이, 나는 병원에서 홀로 진통을 견뎌야 했다.

“아무도 같이 안 왔어요?”

병원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물어보신다.

“그렇게 되었어요. 남편이 지방에 있어서 오는 중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은 했지만 뱃속의 아이가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아이처럼 보여 서운했고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로 강해야 했다. 세 번째도 딸이라는 무언의 압박도 견뎠는데 뭘.(이미 4개월 때 충분히 힘들었다)


진통 간격이 짧아질 때쯤 남편이 도착했다. 손을 꼭 잡아주고 허리로 진통을 하는 내 등뒤를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진통이 연속적으로  때 우리는 함께 특수분만실로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진통을 견뎌 아이가 덜 힘들게 빨리 나올 수 있도록 힘주는 것이었다.

‘막내야, 얼른 나오렴. 네가 덜 힘들게 엄마가 열심히 힘줄게.‘


그렇게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훨씬 지나 2008년 1월 24일 오후 1시 25분,  3.16kg 52cm. 건강하게 막내가 태어났다. 정말 거짓말처럼 진통이 싹 사라졌다. 남편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아이의 탯줄을 잘랐다.

“너무 고생했어.”


남편은 내가 회복실에 있을 때 나가더니 커다란 꽃바구니를 사 왔다. 이후 함께 근무하는 분들의 축하 꽃바구니가 왔지만 남편의 꽃바구니가 가장 컸다. 그 마음을 안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 빈 공간으로 꽃으로 향기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렇게 입원 후 조용히 있다가 며칠 뒤, 우리 둘, 아니 셋은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한 막내를 나 혼자 속으로 불렀던 태명이 있었다. 남편과 나, 위의 두 언니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막내의 이름을 정했다. 그 후보 중 태명이 있었고  어느새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세 딸의 엄마가 되었다.


막내를 키우면서 참 즐거웠다. 부모로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큰 아이들과 달리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아이를 키우는 기쁨도 맘껏 표현했다. 많이 안아주고 많이 웃어주었다. 막내여서도 그렇지만 나만이 느끼는 마음 한구석의 애처로움이 항상 있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라면서 충분히 자신의 사랑스러운 존재감을 보였다. 밝고 사랑받은 느낌이 난다. 모두들 귀여워했고 아무도 나에게 더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막내의 얼마 전 생일날, 아이가 좋아하는 초밥집에 온 식구가 총출동해서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이는 근처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을 만난단다. 나가는 아이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주고 잘 놀고 오라고 인사했다.


누구에게나 탄생이 축복으로만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후 자기 존재의 기쁨을 느끼도록 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다. 막내가 자기가 태어나는 날의 쓸쓸함을 모르도록, 알더라도 지금이 좋아 별 의미 없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힘겹게 마음을 보냈던 그 막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소리가 나는 지금까지, 지금도 바로 앞에서 친구들이 생일메시지 보내줬다며 행복하게 카톡을 보는 이 순간도, 먹고 싶은 메뉴를 물으니 닭발이 먹고 싶단 소리에 아침산책길에 닭발과 야채를 사 와 냉장고 안에 넣어둔 든든한 이 순간도


그저 모두 평온해서, 그리고 일상이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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