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Feb 02. 2024

<프롤로그> 난 이기적 인간이다

‘넌 어째 애가 잔정이 없니.’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아빠와 다투고 난 뒤였다. 딸이면서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반응에 속상했던 말을 토해내셨다.     


내성적이면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했다. 태어나면서부터의 기질인지 어려서 많은 가족 사이에서 지내며 굳어진 성격인지는 모른다. 나는 내 안을 탐구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해 책임지고 살펴야 하는 위치로 바뀐 것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온전히 부모에게 의지하니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하지만 커가면서 ‘자기’가 강해지니 어려움이 더욱 생겼다. 남에게 관심이 없던 내가 어느새 항상 스탠바이 상태다. 아이들을 향해 안테나를 세워 관찰하게 되었다.      


복잡한 골목에서 마구 뛰어다니던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일, 아이가 처음으로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왔던 일, 친구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던 일, 아이가 얘기도 없이 자정이 넘도록 집에 오지 않았던 일, 잘못했다고 가방 싸서 문밖으로 쫓아낸 일, 온종일 말도 없이 방안에만 있는 아이를 문밖에서 지켜보기만 한 일, 아이보다 더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화냈던 일, 등등. 세 아이를 키우면서 예상되는 일만큼 변수도 많았다. 사실 여기에 적지 못하는 일들도 많다. 엄마로서도 처음 겪는 상황에 아이에게 실수도, 잘못도 많이 했다. 의도치는 않았다 해도 상처를 많이 주었다.




세 아이는 각자 자신의 속도대로 자라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엄마로서 아이보다 더 느리게 커갔다. 성장 과정마다 다 다르니 그것에 맞춰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야 했다. 첫째의 15살과 막내의 15살은 달랐다. 아이들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것도 늦게 깨달았다. 내 생각만으로 기준을 맞추어서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때로는 참아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는 걸 아이들로부터 배웠다. 수시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도 꾹꾹 눌러야 했다. 그렇게 역방향의 에너지를 쓰느라 애를 참 많이 썼다. 부모가 자식을 겉 낳았지 속 낳았나,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 등 부모와 관련된 속담과 관용어들이 처절히 이해되는 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나이에 나는 어땠지? 어떤 생각을 했지?’

‘나는 내 부모의 말을 무조건 잘 들었나?’

‘우리 엄마 아빠는 나의 모든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까?’

질문을 하면 할수록 ‘아니다’라는 결론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렸던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관심의 폭이 좁은 나에게 그림은 좀 더 적극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눈이 되어 주었다. 그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다시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의 어원은 마음에 새긴다는 뜻인 ‘긁다’라고 한다. 나도 아이를 그리면서 마음속에 긁고, 새겨 넣고, 되새기고, 다독였다.     


여전히 나는 나에게 관심이 많다. 나를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고민한다. 나를 잃지 않으려고도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바라본 날것의 ‘진짜 나’를 고민하는 것도 나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안에서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 글들은 내가 아이들로부터 배운 부모 마음의 작은 흔적이다. 타인에게 관심 없던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민하고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시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기록이다. 여전히 부족한 내가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