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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Feb 23. 2024

아름답게 남는 방법

큰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 미성년과 달라진 생황을 만끽하고 싶었던 아이와 달리 우리 눈에는 여전히 더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전부터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에 맞게 대하겠다고 항상 생각했지만 언제나 이론과 실제의 간극은 닥쳐봐야 안다. 아이는 우리가 허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갈등은 점점 커져 갔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동안 머리로는 수없이 되뇌었는데 막상 아이를 보낸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머리와 마음의 거리는 이다지도 멀었다. 어지러운 세상도 무섭거니와 아이가 잘 해낼까 봐 못 미더운 걱정이 앞선 것이다. 남편은 단호했고 나는 중간에서 참 마음이 쓰렸다. 철없어 보이기만 한 아이의 모습에 울며불며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딸과 남편 사이에서 심란했던 초여름의 아침, 무작정 나갔다. 새벽부터 내린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애써 삭히며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멀리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꽃받침만 남아 있는 민들레였다. 씨앗 하나 없이 동자승 머리처럼 말끔한 가운데 부분에서 방사형으로 힘차게 뻗어있는 꽃받침. 꽃받침이 꽃인 듯 그렇게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남았을까.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아름다움의 정점인 꽃에서 민들레는 수많은 씨앗을 저 멀리 날려 보낸다. 꽃과 씨를 떠나보내고 남은 그 아름다운 자리.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 왠지 더 당당해 보였다. 숙명의 역할을 다한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 옆엔 미처 씨를 날려 보내지 못한 민들레가 있었다. 빗물에 씨앗의 털들이 흠뻑 젖어 시커멓게 엉켜 축 늘어져 있었다. 비 오기 전에 씨앗들이 미처 날아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옆의 꽃받침만 남은 민들레와 달리 위축되어 보였다. 꼭 미련이 남아 아이를 보내지 못하는 내 모습처럼.     


민들레는 노란 꽃자리에 씨앗을 만든다. 씨앗은 멀리 가야만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만약 씨앗을 보내기 싫어 곁에 계속 남겨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오늘처럼 빗물에 젖어 결국 함께 썩을 수도 있고 다행히 싹이 트더라도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씨앗과 이별해야 하는 게 민들레의 숙명이다. 아니, 모든 꽃의 숙명이다. 맞다, 모든 부모의 숙명이다. 더 멀리 보내야만 멋진 이별이 되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이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그저 붙들려고만 했구나. 눈앞이 어느 정도 또렷해질 때쯤 머릿속도 개운해졌다. 건강하게 떠나보내야 할 때임을. 너도, 나도 아름다울 수 있게.     


그렇게 아이를 독립시켰다. 어느 부모가 걱정이 안 될까. 하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잘 해냈다. 가족 관계도 인간관계인지라 적정한 감정 거리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후 다시 집으로 들어온 아이와의 관계도 크게 나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더 넓은 아이였음을 깨달았다.     


언젠가 이별해야 하는 존재들은 현명하게 헤어질 때를 알아야 한다. 떠나보낸 자리도 함께 아름다울 수 있도록 보내야 할 순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씨앗을 떠나보낸 민들레 꽃받침처럼. 떠나보내야 할 때를 모르면 함께 힘들어진다. 미처 보내지 못해 빗물에 젖어 뭉친 씨앗이 매달려 썩어 거무튀튀했던 민들레처럼.     


우리 주변엔 아름답게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가 아이를 현명하게 떠나보내는 것도, 자신의 과거를 떠나보내는 것도, 헤어진 연인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것도. 떠나보내야 할 것을 놓지 못하고 내내 마음속에서 잡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때를 알아채는 것은 용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한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민들레 꽃받침을 그리면서 생각해 본다. 내 안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을 떠나보내야 할 때는 언제일까? 성인으로 향하는 아이를 보면서 미련을 두었던 감정들도, 차마 아쉬워 보내지 못하는 마음마저 때를 알아채고 용기 있게 보낼 수 있는 통찰과 결단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떠난 무언가도, 떠나보낸 나도 아름답게 남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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