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Mar 01. 2024

나에게 너는

큰 아이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지 모른다고 했다. 특성화고를 선택했고 즐겁게 다녔다. 그리고는 졸업도 전에 서울에 있는 한 회사에 들어갔다. 아이는 스스로 길을 찾아갔다.     


나는 처음에 아이에게 대학을 가기를 여러 번 권했다. 직장 다니다가 원하면 그만두고 학업을 이어가도 된다고도 했다. 학벌 때문이라기보다 고등학생에서 바로 사회인이 되어버린 큰 딸에 대한 안쓰러움이 먼저였다. 성인이면서 학생이라는 혜택으로 마음껏 놀고 경험하고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는 대학 시절을 아이가 건너뛴 상태로 정글 같은 사회생활에 뛰어든 것이 마음에 쓰였다.     


회사가 집에서 멀어 힘들게 다니다가 아이는 독립을 했다. 보태줄 돈이 넉넉지 않으니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 자취방을 정하지 못하고 서울 경계의 어느 지역에 작은 방을 구해주었다. 그것도 보증금은 엄마한테 빌리는 거라 했고 월세와 관리비, 생활비까지 네가 번 돈으로 알아서 살아보라고 했다.     


그렇게 독립한 지 몇 개월. 독한 엄마는 빌려준 보증금도 매달 50만 원씩 꼬박꼬박 받아냈고 그 외 생활비가 모자라 빌려준 돈도 얄짤없이 받았다. 자동이체시켜 준 가스요금이나 전기요금까지 모두 아이는 나에게 이체했다.     


“엄마, 이거.”     


회사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빨간 에나멜의, 그야말로 회사 기념품인 명함 지갑이었다. 나는 카드와 지폐를 꺼내 딸이 준 명함지갑으로 옮겼다. 그리고 지갑으로 가지고 다녔다. 여미는 곳에 단추나 자석도 없어 자꾸 벌어졌다. 막내딸의 민트색 고무줄 머리끈으로 고정시켜서 계속 썼다.


지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딸의 회사 명함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건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작은 소품이었지만 아이가 처음 회사에서 받아 준 물건을 필요 없다고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는 것은 아이한테 함부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랬다. 소중히 다루어주고 싶었다. 지금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고 너의 길을 응원한다고. 네가 회사 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이 빨간 명함 지갑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또 다른 길을 가는 딸의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일이었다. 

“엄마, 이거.”

큰 아이는 자기가 번 돈으로 지갑 선물을 사 왔다. 고무줄로 묶고 다니는 엄마의 명함 지갑을 보고 산 모양이다.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로 선물을 샀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딸이 준 지갑으로 얼른 내용물을 옮겼다. 하지만 빨간 명함 지갑은 버릴 수 없었다. 너의 첫 사회생활과 나의 응원이 담긴 그 지갑.    


선물과 함께 준 편지를 보고 눈이 뻐근해졌다. 그동안의 숱한 에피소드들이 떠올랐고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에, 어떤 상황에서도 연결되어야 할 관계를 잊지 않음에,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에 가슴 한켠에 먹먹해졌다. 이 표현력 부족한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딸도 크고 있었고 나도 아직도 크고 있다.     

엄마도 무뚝뚝하게 표현 많이 못해줘서 미안해. 우리 이렇게 함께 성장하자. 너희로 배운 게 많은 건 정작 엄마야.     

    


이전 04화 아름답게 남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