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민초파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절대 민트초코는 고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여러 맛을 골라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그 경계의 맛이 느껴지는 순간 혀가 운동을 멈춘다. 무슨 이런 맛을 좋아하지?
큰 딸은 나에게 민트초코같은 존재였다. 옳고 그름의 일은 아니지만 성향이 참 다른. 나와 다른 모습이 많은 아이. 부모라는 위치로 그 사이의 간극을 이성과 감성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반민초파가 민초파를 이해해야 하는 자리.
사람을 만나도 나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에 비해 큰 딸은 항상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약속이 일주일 내내 있다.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자기 주장이 강하기도 하다. 난 빈 집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주말이 너무 무료하다며 약속이 없는 날이면 쉴 새 없이 쿠키를 구웠다. 의견을 먼저 묻기보다 자신이 생각한 계획대로 한 후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와야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서 답답하기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을 다니는 아이가 안쓰러워 잠시 직장을 쉬게 되었을 때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당분간 학교만 다니면서 좀 쉬는 게 어때?”
그랬더니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이야기한다.
“엄마, 나는 집에서 그냥 있는 시간이 더 힘들어.”
그러더니 수많은 면접 끝에 결국 본인이 원하는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갔다.
나와 다른 아이를 이해하는데 참 시간이 걸렸다. 어려서는 얘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예상과 다른 아이의 행동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모범생이었던 나에 비해 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면 머리로는 이해하려 노력해도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잔소리를 하고 싶은 걸 참고 때로는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느라 정말 속이 타들어 가기도 했다.
지금은 그 민트초코같은 아이를 이해한다. 아니, 이해한다기보다 인정한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속이 문드러지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서서히 필요했지만 그래도 나아진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 이런 맛도 있구나. 나는 낯설지만 너는 항상 찾는 맛. 나는 싫어하지만 너는 좋아하는 맛. 그렇게 너를 통해 맛보다 보니 가끔은 입안이 개운해지는 그 맛이 괜찮을 때도 있구나.
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인간은 참 철저히 개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쌓아온 문명이 있고 경험이 있고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개인의 삶은 각자 깨닫고 느끼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소우주의 세계인 듯 하다. 그걸 ‘부모’가 되면 다들 잊는다.
삶을 살아온 어른으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려고 잔소리를 하지만 큰 딸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스스로 깨달아서야 변화했다. 딸이라는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견뎌온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