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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Mar 09. 2024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망설이는 시간은 시작할 때다. 정말 그리고 싶은 마음이 손보다 앞서 그대로 그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그렇다. 그렇게 여러 해 그림을 그렸어도 시작하기 전 연필을 종이에 닿는 순간이 가장 조심스럽다. 어떻게 나올까 자신이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리기 시작하면 망설임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내 눈과 손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시작하면 끝을 본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작가 못지않게 집중한다. 어떻게 표현이 되든 내 눈과 손의 과정을, 그 결과를 인정하고 사랑한다. 결과까지 마음이 들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연필 앞에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전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왔지 하는 망설임이 훅 다가온다. 내가 기초부터 배운 사람이 아니어서인가 의심도 한다. 선뜻 첫 선을 긋기 힘들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날은 내 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인지 그 결과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요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아니, 그런 날이 제법 많았다. 그럴 때면 잠시 멈칫했다가 그냥 그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냥 연필을 내려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억지로 그리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나는 이렇구나.

이런 날의 그림이구나.

매일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

그대로의 그림도 괜찮아.

이런 날도 괜찮아.


어차피 난 다시 그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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