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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Mar 02. 2024

연필을 깎았다

어느새 연필이 많이 무뎌졌다. 뭉툭해진 걸 모으니 여러 자루다. 휴지를 깔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자주 쓰던 2B, 4B연필을 커터칼을 이용해 길게. 심을 둘러싼 나무가 슥슥 깎여 나가 돌돌 말리는 걸 보는 것도 원가 개운하다. 결이 다르게 심이 갈려 나가는 소리도 좋다. 고요한 날 어느 사찰의 풍경소리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꺼번에 더 깎을까 하고 선반 아래 연필 전용 롤필통을 오랜만에 열어보았다. 다른 곳에 없는 물욕이 연필에 모여 제법 다양한 종류의 새 연필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신기해서, 새로운 브랜드라,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어서, 비싸다고 소문난 거여서, 디자인이 예뻐서 등 여러 이유로 모아둔 연필이 가득했다.


연필은 써야 맛이다. 그동안 아낀다고 두었던 연필들을 모두 깎았다. 우선 준비를 해놓았으니 언제든 꺼내 바로 그릴 수 있겠다는 기대로 다시 차곡차곡 넣었다. 연필이 장식품으로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가 되어야 의미가 있으니까. 열쇠가 녹슬지 않게 열심히 기름칠을 하듯 정성을 들여 깎아 넣으니 든든하다.



연필 깎는 행위는 대학 시절 서예동아리에서 먹을 가는 느낌과 유사했다.  붓글씨를 쓰기 전 벼루에 먹을 가는 행위에 대해 마음을 정성스레 닦는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차분해진 마음으로 집중해서 글씨를 썼다. 요즘엔 갈아놓은 먹물도 많이 이용하지만 나는 먹 가는 행위가 참 좋았다. 연필 깎기도 마찬가지다.  그림 그리기 전 연필을 깎는 의식을 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집중의 모드로 들어간다. 점점 쌓이는 연필 찌꺼기를 바라보는 고요함도 좋았다.


다 깎은 연필들을 종류별로 테스트해 보았다.  많이 쓰던 연필도 있고, 가지고만 있다가 이번에 처음 써보는 연필도 제법 있다. 브랜드와 연필심의 종류를 써가며 하나하나 찬찬히 그 느낌을 손끝으로 느낀다. 눈에서 달리 보이고 귀에서 소리가 달리 들렸다. 차이 나게, 때론 미묘하게 달라지는 연필의 색감, 마찰음, 촉감, 필기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다양한 재료들을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난 언제나 연필이 가장 좋다. 연필은 나에게  하나의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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