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비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

by 케이론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센티해진다고 하지만, 나는 솔직히 하늘이 어둡네, 우산을 챙겨야겠네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저 흘려보내던 날씨 변화를, 내 손끝에 닿는 종이는 매번 온몸으로 알려주곤 했다. 이 녀석은 날씨 변화에 그렇게 예민할 수가 없었다.


비가 내내 오는 날, 한껏 습기를 먹은 종이는 흐늘거린다. 연필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습기를 먹은 종이는 흑연을 밀어냈다. 연필을 종이에 대는 순간 안다. 사각거리던 익숙한 소리 대신 눅눅하고 텁텁한 저항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색도 제대로 남지 않아 겉돌 뿐, 선 하나를 제대로 그를 수가 없다.


수채화도 그렇다. 비 오는 날, 때론 습기를 흡수한 수채화 종이는 천천히 말라서 맑은 날보다 그림 그리기 좋은 조건이 되기도 한다. 천천히 그릴 수 있게 종이의 수분을 공기가 잡아준다. 반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같은 대상을 그려도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은 그림의 느낌이 다르다. 원하는 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참 곤란한 일이다.


사실 종이는 비를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싫어했던 건,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였다. 습기 때문에 안 그려지는 거야, 종이 상태가 안 좋아 원하는 대로 색이 나오지 않는 거야, 탓할 것만 찾았다. 종이 탓, 연필 탓, 급기야 비 탓까지 하면서 애꿎은 곳으로 핑계를 댔다. 그저 내 통제 밖에 있는 이 상황을 내가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유독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꼭 그럴 만한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어쩌면 그건 이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내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억지로 설명하려다 보면, 자꾸만 핑계만 늘어날 뿐이다. 그저 납득하고 싶어서 애썼을 뿐, 사실은 내 인식의 테두리가 생각보다 작았던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나를 넘어서는 상황이라면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기다려보는 것도 필요하다. 비는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종이는 다시 마를 테니까. 지금은 아니라고 내 마음이 외칠 땐 잠시 마를 때까지 쉬어도 좋다.


그러니, 마음이 젖었다면 굳이 그리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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