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70,
성은 구, 이름은 말숙
봄날 오후 라디오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흠칫 놀라 깬 건 그놈의
영감탱이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 눔의 여편네가 하루종일
자빠져서 밥도 안 차리고
여적까지 자빠져 잠이나 자고 있어?"
참을 만큼 참았다.
가슴의 새까만 응어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매일밤
짐을 싸며 몰래 울며 지새운
나날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남편은 외아들로 태어나
온갖 대접을 다 받고 자랐고,
남편을 끔찍이도 아끼던
시어머니는 내가 시집오던 해에
쓰러져 몇십 년을 방구들 신세를 졌다.
나는 군소리 없이 아버님을 모셔가며
어머니 병시중까지 다 들었고
내가 60이 되던 해 두 분이 함께
생을 마감하셨다.
내 꽃다운 세월이 다 져버린 것
같아서 허망하지만 며느리 된
도리는 다했고 자식들 모두
출가시켰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구나.'
시부모님이 떠나시고 나서 좀 편해
지나 했는데, 남편 퇴직하고 나서
삼시세끼 밥을 해먹이고 저 면상을
종일 보고 살려니 울화통이 다 터진다.
남편은 평소에 조용한 성격에
괴팍하기는 또 이를 데 없어
오던 친구도 다 떠나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성격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친구라도 만날라 치면
언제 들어올 거냐 밥은 언제 해줄 거냐
전화를 해대는 통에 결혼하고
50 평생 맘 편히 친구랑 수다 한번
떨어본 기억이 없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가슴밑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용암 부출하듯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이야,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짐가방을
꺼내고 친구가 내게 준 차키를
들고 문을 쾅 닫고 나와버렸다.
지난해 나는 늦은 나이에 면허를
땄다. 그리고 가장 친했던 친구
정숙이. 정숙이가 죽기 전 내게
차키를 손에 쥐어 주었다.
"말숙아~이제 참지 마...
더는... 훨훨 날아라...
이제 너도 할 만큼 했다..."
정숙이는 어느 가을날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어렸을 적부터 동네 여기저기를
손잡고 뛰어다녔고, 내가 힘들 때마다
군말 없이 달려오던 나의 벗.
무작정 달렸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한강둔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강에 앉아서 라면 한 사발
먹으면서 앉아있으면
끝내준다~"
정숙이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이
떠난 후에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잠에 들기 전에는 꼭 내게 전화를
걸곤 했다. 함께였었다면 좋았을걸.
그놈의 인간만 아니었어도!
또 울화통이 치민다.
나는 주차를 대충 하고 한강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봄이라지만 밤기운은 제법 쌀쌀해서
코트깃을 단단히 여몄다.
"컵라면 하나 주세요~!"
한강 벤치에 앉아서 먹는 컵라면 맛이란!
누구 밥을 차려주는 게 아니고
그냥 내 배속만 채우면 된다는 홀가분함이란.
가슴속이 다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컵라면 한 사발을 국물까지 말끔하게
해치우고 나서 정숙이가 나에게 준
봉투를 조심스레 열어봤다.
"말숙아... 이걸 읽을 때쯤에는
내가 네 옆에 없겠지?
나는 네가 때론 친구 같고 동생 같고
때로는 엄마 같고 그랬어.
너는 내가 옆에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했지만 나야말로 네가 옆에 있어서
세상이 더 살맛 났어.
남편 떠나고 힘들어할 때
네가 그랬지? 이제 내가 네 빈자리 채워줄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그때 내가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밤새 펑펑 울었어...
말숙아... 안에 목걸이 네 거야. 거기로
가봐. 내가 너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봉투를 거꾸로 들어보다 바닥에
뭔가 툭하고 떨어졌다.
목걸이다. 그리고 열쇠가 매달려 있다.
열쇠에 글씨가 써져 있다.
주소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네비를 켜고 주소를 찍고 다시
밤길 속을 달렸다.
새벽 12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빨간 지붕과 벽돌집 그리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 테라스 너무 예쁜 집이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열쇠로
문을 열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불을 켰다.
집안은 유럽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
인테리어였다. 벽난로와 러그 그리고
푹신한 소파와 티테이블 아늑한
주방 알록달록한 식기들까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벽에는 고향마을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주방식탁에 앉아있는데, 편지 한 통이 눈에
띄었다.
"말숙아~ 잘 찾아왔네? 여기는 내 평생
번돈으로 마련한 곳이야. 자식들은
살만큼 남겨주고 이곳이 내 전재산이야.
나는 이곳을 너에게 주고 싶었어.
넌 늘 입버릇처럼 죽기생전 유럽 가고
싶다고 했잖아. 유럽은 아니라도 네가
마음 답답할 때 숨통 트일 곳은 있어야
하잖아. 자주 와서 쉬어. 내가 항상
네 곁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정숙이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5년 전에...
병원신세는 지기 싫다며
집에서 지내다 암환자 같지 않게
정말 고운 얼굴로 떠났다.
이곳 곳곳에 정숙이의 손길이 느껴진다.
오래 비워둔 것 치고는 모든 곳이
산뜻했다.
나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앉아있다 러그 위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인기척 소리에 잠에서 깨니
누군가가 주방에서
떨그럭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지수가 여기 왜 있지?'
지수는 정숙이의 막내딸이다.
늘 친구 같고 속 깊고 배려심 많은
딸이라고 입에 달고 살던 아이였다.
지금은 정신과 의사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놀라셨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탁을 했어요.
저한테... 아주머니가 이 집을
찾기 전에 와서 자주 좀 들여다보라고...
이제 저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
"지수야...
밥 먹고 가...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아니에요. 아주머니, 엄마가
이 말 꼭 전해주랬어요.
말숙아~ 이제 누구 밥 말고
너를 위해서 밥 해~라고요!
저는 근처 맛집 탐방이나 하려고요~!!!"
도로 누워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다 일어나 보니
벽시계가 11시를 가리켰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잤나?"
그때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손녀딸이 알려준 대로 핸드폰을
열고 검색을 했다. 주변에 마트가
한 군데 있는 걸로 나와서 대충 차려입고
마트로 향했다.
마트는 생각보다 컸고,
웬만한 물건들은 다 있었다.
우선 쌀을 사고 밀가루랑
오징어 쪽파 그리고 막걸리
한통을 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하고 테라스에
버너를 놓고 부침개 반죽을 했다.
막걸리는 냉동에 넣어두었다.
치이이~~~~~~~
부침개 반죽을 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약간 살얼음 막걸리를 사발에
한잔 따라놓고 갓 부친
부침개 한입을 입에 쏙 넣었다.
그러고서 막걸리 한 사발을
원샷했다.
"이맛이지~~~ 정숙아~~~ 고맙다~~~"
눈물이 흘렀다. 맞은편에 정숙이가
앉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움에 가슴이 아렸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배도 부르고 취기도 오르고
뽕짝을 틀어놓고 스텝을 밟았다.
남편이 소란스럽다며 음악을
꺼버릴 때마다 얼마나 밉던지...
누구 하나 신경 쓸 필요 없이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이 눔의 영감탱이~~~ 내가
가나 봐라~~~"
'아들, 딸이 꼬박꼬박 준 용돈을
몰래 꼬불쳐 뒀다가 이럴 때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구나.'
말년은 걱정 없이 지낼 정도의 비자금이
있었다. 매달 나오는 노령연금과
통장에 있는 돈 그리고 매달 아이들이
보내주는 용돈이면 여기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 해도 거뜬했다.
이제 삼시 세 끼 밥도 안 해도 되고
괴팍한 영감탱이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너무 홀가분했다.
먹은 그릇을 대충 개수대에 넣어놓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티브이를 틀었다.
티브이에서는 캠퍼스의 젊은 연인들이
서로를 뜨겁게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18살 꿈에 부풀어 있던 그때,
옆마을 살던 오라버니를 좋아했었다.
오라버니는 미남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잘 생겼고 키도 컸다.
오뚝한 콧날과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
옆마을 정숙이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있는데 오라버니가 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졌다.
"넌 못 보던 앤 데 어디 사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정숙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말숙아~너 뺨이...
너 열나냐?"
"아무것도 아냐~"
정숙이는 우리 마을에 살다가 옆마을로
이사를 왔다. 내 집마련이 꿈이던
정숙이 어머니는 꿈을 이뤘다.
그 후로 학교 가는 길에 그 오라버니와
여러 번 마주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네 어귀에서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가 가까이 오더니 옆에
앉았다.
"이 꽃 이름은 꽃마리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난 영일이야. 넌?"
고개를 돌리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말숙이요..."
그때였다. 오라버니가 갑자기
바닥에 나자빠지더니...
"쥐~~~ 쥐... 아악~~~"
"어디요? 쥐가 어디 있어요?
아악~~~~"
영일 오라버니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함께 어울렸다. 정숙이와
함께인 날도 있었고 둘이서만 함께인
날도 있었다. 알고 보니 영일오라버니는
정숙이의 친오라버니와 친한 사이였다.
먼 동네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전학 온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오라버니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자기가
쓴 글을 내게 종종 보여주곤 했다.
그 눈빛이 얼마나 빛이 나던지...
그럴 때마다 별처럼 반짝였다.
오라버니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언젠가는 유명한 소설가가 될 거니
미리부터 사인 받아놓아야 할걸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는 그런 오라버니가 자랑스러웠다.
'꿈이 있다는 건 멋진 거구나.'
나는 꿈이 없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간호대에 들어가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순간 오라버니는 나의 빛이 되었고,
열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오라버니는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유품에는 나에게
부치려던 편지가 있었다.
"말숙아...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을
정했어.
이 사람이다.
평생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볼이 빨개지도록 수줍어하던
네 얼굴 그리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무엇보다 내 얘기를
그렇게 가만히 귀 기울여주고
가만히 토닥이던 너의 손길까지...
너와 함께라면 어디까지고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비록 내 꿈을 펼치기도
전이지만 나는 꼭 멋진 소설가가
될 거고 너를 소설가의 아내로
만들 거야. 내 곁에 있어줄래?"
이 편지를 아직도 몰래 숨겨두고
있었다. 지금 그 편지는 캐리어
에 들어있다.
비밀 일기장에...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마음을
고이고이 묵혀두고 가끔씩 힘들 때면
꺼내보기도 했다.
만약 오라버니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남편은 연애하던 시절 나에게 살뜰했다.
결혼하고 나서 시어머니 병시중에
지친 내가 자리에만 누우면 잠에 드니
사랑 담을 쌓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괴팍해지더니
잔소리가 늘기 시작하고 쓸데없는
일에 트집 잡기 일쑤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편도
외로웠던 걸까?
그리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저렇게 표현했던 걸까?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으로 찾아왔다.
처음엔 말이 없었다.
남편을 봐도 이제 무덤덤해졌기에
고개를 돌리고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이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한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청국장이랑
생채를... 노련한 손놀림으로...
별 찬없이 청국장과 생채만 있는데도
감격스러웠다.
"나 집 팔았어...
이제 갈 데도 없어...
이제 남은 평생 내가 밥 할 테니까
나 내쫓지만 말아..."
눈물이 났다.
남편은 말없이 다가와
품에 나를 안았다.
내 나이 70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랑하기에 우리는 늦지 않았다.
그래도
내 사랑은 영수
70 할아버지가 뜨겁게 포옹하고
입 맞췄다.
"사랑해~말숙아...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그걸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