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공식을 꼭 깨고 싶다.
은우를 처음 만난 건 도서관에서다. 창가에 서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를 봤다. 유난히도 검은 머리칼. 바람에 날리던 그 머리칼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빠가 좋아하던 샴푸향기. 나는 은우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돼 버렸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에 갔다. 은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척 책 너머로 계속 그를 바라봤다. 매일 그자리에 은우는 서있었다.
'대체 뭘 보고 있는거람?'
창밖을 봤지만 보이는 건 거대한 플라타너스 한그루와 벤치 뿐이었다.
'저 벤치인가?'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은우가 달려가는게 보였다.
'어디를 저렇게 바삐 가는 거지?'
다음날 은우는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렇게 은우가 기억에서 잊혀져 갈때쯤
학교 근처 카페에서 그를 봤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좀 헬쓱해진 얼굴로. 그때 마침
친구들이 와있어서 은우와 이야기 하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야~ 괜찮은 거냐? 힘들면 형아한테 기대~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은우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학비를 마련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은우는 소위 금수저였지만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어느날 은우는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가 자꾸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내 어깨위로 툭 떨어졌다.
한시간이 지나도록 은우는 깨지 않았다. 나는 살짝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도 지쳐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때는 은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A4용지가 벤치에 붙어있었다.
조용히 지나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 여자친구입니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저장해. 난 하은우, 나랑 사귈래?
아니면 친구할래?"
우리는 그날 이후 연인이 되었다. 은우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로 쉴틈이 없었지만 매일 한번씩은 전화했고,
토요일이면 꼭 나를 보러 왔다.
"봄아~ 나...파리 가..."
"뭐?"
은우는 파티쉐가 되는게 꿈이었고,
파리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멀어지는 건가?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봄아~나랑 같이 갈래?"
은우는 그해 봄 파리로 떠났다. 처음엔 자주 연락했지만
차츰 연락이 뜸해졌다. 나는 취업준비로 바빴고
얼마후 방송국 라디오 피디로 일하게 되었다. 어느정도 일에도 익숙해질 무렵 사연 하나가 올라왔다.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파리에 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꼭 고백하고 싶어요.
봄아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은우는 그후 몇달뒤 돌아왔고 호텔 파티쉐로
일하게 됐다.
은우는 나의 첫사랑이고
우리 아이의 아빠이다.
나는 첫사랑의 공식을 깨고 싶었다.
몇번의 이별과 만남에도 지치지
않으면 이기는 거다.
이제 그에게서는 매일 버터향기 같은게
난다.
부시시한 머리칼을 하고서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때 너무 사랑스러워서
오늘도 그의 입술에 입맞춘다.
오늘도 나는 사연을 띄운다.
플라타너스 벤치로.
"은우야. 사랑해."
그의 사진첩에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내 사진이 있었던 건 영원히 비밀_훗
아마도 우린_처음부터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너무 예뻐서...자꾸 보게 돼..."
"너무 멋져서...자꾸 보게 돼..."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