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10명 가운데 4명 이상이 외상 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수면 장애를 겪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2:30)
잠은 오지 않지만 매일 같은 시간 습관적으로 매트리스에 몸을 누여본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불면증의 시작은 소방관으로 근무할 때 밤과 낮이 바뀌는 교대근무와 야간 근무 중 수시로 출동하는 일이 밤새도록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찾아왔고 은퇴 후에는 심리적 안정으로 나아지려나 기대했지만 불면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현직 때는 잠을 자지 못하면 다음날 근무에 지장이 있는지라 오늘밤 또 잠을 설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많았지만 은퇴 후에는 출근할 부담이 없으니 그리 긴장이나 걱정은 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불면증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처음 잠들기 시작해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는 소위 통잠을 잔 기억이 거의 없다. 아니 근 10년 간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눕자 말자 코를 고는 잠의 고수들이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보니 아침인 적이 있기는 했다.
"아 드디어 나도 통잠을 자는 건가"감격한 나머지 "나 어제 술기운에 통잠 잔 것 같아"아내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더니"여보 기억 않나요 자다가 당신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가보니 침대에 앉아 계속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욕을 하고 있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 씁쓸한 기억이다.
오늘밤도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눕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 눕기를 반복하며 잠을 청해 보지만 온갖 잡생각만 머리에서 아른 거리고 통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01.00)
한참을 잔 것 같은데 깨어보니 아직 사방은 온통 어둠이다. 일어난 김에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고 지금은 도대체 몇 시쯤 되었을까 시계를 보고 싶었지만 불면증 증상이 있을 때는 중간에 깨어서는 시계를 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 꾹 참고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여러 가지 건전하지 못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밀려와 정신이 더 말똥말똥 해진다. 시간 확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할 수없이 핸드폰 시계를 본다. 새벽 3시는 넘었겠지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새벽 1시, 절망이다. 대관령목장의 양의 숫자를 세어볼까, 명상을 해볼까 온갖 방법들을 떠올려 보지만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다. 애꿎은 베개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었다.
(03:30)
차량이 90도 급경사를 오르는 꿈을 꾸다 놀라 잠을 깼다. 소중한 잠을 깨긴 했지만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면증이 생기고부터는 잠시 잠을 자는 사이에도 참 다양한 스토리들이 꿈속에서 전개된다.
현직 때는 매일밤 소방차가 출동하다가 빠지거나 굴러 떨어져 현장까지 가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주로
소방관과 관련된 꿈을 많이 꾸곤 했는데 은퇴 후에는 주로 산속에서 조난을 당하거나 오늘처럼 급경사를
오르고 높은 곳에 매달려서 떨어질 뻔하는 스토리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아닌데 내 안의 그 무엇이 매일밤 그토록 다양한 스토리를 창작해 내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혹시 간밤에 계엄령 같은 게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본다.
폰을 열은 김에 카톡 프로필 변경된 지인들이 있나 확인하고 인스타도 열어서 지인들의 소식을 이것저것 보다 보니 시간은 새벽 4시를 넘기고 살며시 졸음이 찾아온다. 밤새 설쳐서 인가 이 시간은 이상하리 만큼 마음도 평화롭고 잠이 스르르 잘 온다.
드디어 아침 7시 알람이 백수의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새벽에 깰 때와는 다르게 이 시간에는 알람소리에도 한 번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새벽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매일매일이 힘들고 긴 밤의 연속이지만 그나마 출근하지 않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리고 현직 때보다 조금은 나아진 수면의 질이라 생각하기에 앞으로는 좀 더 좋아지겠지 이제 겨우 은퇴 1년 6개월, 32년을 그리 살았는데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잘 자는 그날을 기다려 보려 한다
"어제는 잠 좀 잤어"로 아침인사를 대신하는 우리 부부. 나는 소방관생활의 후유증으로 아내는 갱년기로 인한 불면증으로 긴 밤을 보내는 우리는 불면증 동지이다. 은퇴한 백수는 걱정이 없지만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의 하루는 얼마나 피곤할까. 응원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출근길에 핸들을 잡으며 백수의 하루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