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가치
어릴 적부터 무대를 동경해서 무대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30대 한창 젊은 나이에 쉬지 않고 공연들을 하면서 놓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촬영이었습니다.
촬영이 들어와도 공연 스케줄과 겹쳐서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뮤지컬을 할 때였습니다.
역을 맡아서 힘겹게 연습을 했고 공연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광고가 있었습니다.
`박카스`
버스가 종점에 다다르고 버스기사는 뒷정리를 하던 중 뒤에서 졸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서
`학생 힘들지?`라고 학생을 깨우며 박카스를 전해줍니다.
이 광고가 그때 당시 핫한 이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후속 광고들은 신인들의 등용문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지방 공연을 가려고 짐을 싸는 중에 캐스팅디렉터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배님 이번에 박카스 광고 진행하려고 하는데 00일 00일 스케줄 괜찮으실까요?`
(대부분 이런 전화는 픽스가 아니라 이미지 맞는 모델들 추려서 촬영 날짜 가능한 모델들로 감독한테 리스트업 시키는 전화다.)
그런데 하필 지방공연 리허설 날이 겹쳤다. 다른 공연들 같았으면 말을 해보겠는데 워낙에 매서운 연출님이시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거절을 했다. 그러고 몇십 분 있다가 또 전화가 왔다.
`선배님 스케줄 조정 안되실까요? 가능성이 있어서 그래요`
이렇게 두 번씩이나 전화를 주는 캐디는 없는데 너무 감사하고 혹 했지만 연출님의 불호령이 두려워 다시 한번 거절을 했다. 그러고 이번엔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전화가 왔다.
`선배님 이거 감독님 하고 광고주 다 픽스되셨어요 그냥 찍으시면 되는데 스케줄 안될까요?`
.....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읽는 분들은 이해 못 하시겠지만 워낙에 무서운 연출님이라.. ㅜㅠ
이렇게 공연 때문에 촬영을 놓친 게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렇다고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난 무대가 더 좋았기 때문에 그리고 무대와의 계약이 더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대는 나에게 세월의 한계를 보여 주었고 인지도라는 잣대를 들이대주었다. 무대만으로 보낸 세월이 무색하게 인지도가 있는 배우들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다.
얼만전 친한 연출님과의 식사자리에서 그분이 하신 말이 나의 가슴을 찔렀다.
`공연하고 행사하고 그러면 누가 제일 돈 못 버는 줄 알아? 배우야 배우! 배우가 제일 못 벌어 배우로 먹고살기 힘들어 배우로 먹고살려면 딱 하나 자기 가치를 높이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 난 나의 가치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무대가 좋아서 연기가 좋아서 달려왔을 뿐이다.
좀 더 영리했다면 좀 더 욕심이 있었다면 이리저리 욕먹어도 촬영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무대가 좋지만 촬영을 선택하려고 한다.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